구약성경에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악하게 여겨서 그 벌로 이스라엘 백성 칠 만 명이 죽게 된다. 그럼 숫자를 센다는 것이 왜 하나님께 이토록 악한 일인가? 숫자를 센다는 것은 숫자를 의존한다는 것이며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며 마귀의 시험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하게 보시는 것이다.
부부사이나 부모, 자녀사이나 많은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고, 가족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사랑과 감사가 가득하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해야 한다. 소유나 지위 등의 숫자 때문에 누구는 위고 누구는 아래면 거기에는 이미 진정한 사랑과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부부와 부모와 자녀는 구별이 있으며, 자녀는 부모를 받들고 존경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위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서로간은 동등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신뢰가 넘치는 부부는 존중하되 친구 같은 관계이며, 부모와 자녀는 존경과 서로 친구 같은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 이런 관계 안에는 숫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숫자를 택할 것인가? 한국의 부모와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하고 노력을 기울인다. 학원을 가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긴장 속에서 수년을 보낸다. 좋은 성적을 위해 즐거움을 마다하고 보약을 먹이고 온갖 투자를 한다. 그런데 수능을 보았는데 평소의 실력보다 훨씬 점수가 적게 나왔다면 숫자가 엉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당신이 낮은 점수를 받은 수능생의 부모라면 어떻게 반응했는가? 부모의 목표가 사랑과 선(善)이면 이 낮은 점수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가 목표였다면 낮은 점수를 받은 자녀에게 화를 내며 “그동안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이것밖에 받지 못했느냐!”하며 무시하고 비난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숫자가 우선이면 사랑도, 이해도, 자녀도, 자신의 기쁨도, 선함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죽는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의 부활을 말하며, 늙음이란 예전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 것을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을 벗어나서 내면적인 것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나이를 말한다. 그런데 새로운 옷을 입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숫자로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너보다 몇 살이나 많은데 나에게 이렇게 대우하는가?” 또는 “내가 너에게 잘해준 것이 몇 번인데.. ”내가 너와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데...”라고 주장한다. 숫자를 말한다는 것은 과거의 옷을 걸치고 새로운 내면의 세계는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또 과거를 갖고 현재를 지배하고 군림하겠다는 것이다. 숫자란 그동안에 노력하고 선을 행하고 사랑한 것에 대한 열매인데 이제는 이 숫자를 근거로 상대방을 서운해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면 그동안의 사랑과 선을 헛된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왕의 명령으로 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는 그동안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얼마나 거대한 것을 이루어냈는지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다윗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했으며, 백성에게 선을 행했으며, 자신으로 인해서 백성이 자유롭고 힘 있게 살았다는 증표이다. 그러나 숫자를 세는 순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며, 내 능력이며, 내 말을 들어야 하며, 나에게 잘해야 하는 것으로, 악한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다윗왕은 숫자를 세는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 모든 힘으로 솔로몬 성전을 준비하는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짜 영적인 세계는 늙어서 아무것도 없을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육체의 시대가 끝나고 더 깊은 세계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지금부터 “옛날에 내가 ~ 을 했다.”라는 과거의 숫자를 세는 일을 중단하고 숫자를 만들어냈던 예전처럼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부부사이나 부모, 자녀사이나 많은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고, 가족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사랑과 감사가 가득하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해야 한다. 소유나 지위 등의 숫자 때문에 누구는 위고 누구는 아래면 거기에는 이미 진정한 사랑과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부부와 부모와 자녀는 구별이 있으며, 자녀는 부모를 받들고 존경해야 하며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위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서로간은 동등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신뢰가 넘치는 부부는 존중하되 친구 같은 관계이며, 부모와 자녀는 존경과 서로 친구 같은 친밀함이 있어야 한다. 이런 관계 안에는 숫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숫자를 택할 것인가? 한국의 부모와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하고 노력을 기울인다. 학원을 가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긴장 속에서 수년을 보낸다. 좋은 성적을 위해 즐거움을 마다하고 보약을 먹이고 온갖 투자를 한다. 그런데 수능을 보았는데 평소의 실력보다 훨씬 점수가 적게 나왔다면 숫자가 엉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당신이 낮은 점수를 받은 수능생의 부모라면 어떻게 반응했는가? 부모의 목표가 사랑과 선(善)이면 이 낮은 점수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가 목표였다면 낮은 점수를 받은 자녀에게 화를 내며 “그동안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이것밖에 받지 못했느냐!”하며 무시하고 비난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숫자가 우선이면 사랑도, 이해도, 자녀도, 자신의 기쁨도, 선함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죽는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의 부활을 말하며, 늙음이란 예전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는 것을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을 벗어나서 내면적인 것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나이를 말한다. 그런데 새로운 옷을 입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숫자로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너보다 몇 살이나 많은데 나에게 이렇게 대우하는가?” 또는 “내가 너에게 잘해준 것이 몇 번인데.. ”내가 너와 함께 산 세월이 얼마인데...”라고 주장한다. 숫자를 말한다는 것은 과거의 옷을 걸치고 새로운 내면의 세계는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또 과거를 갖고 현재를 지배하고 군림하겠다는 것이다. 숫자란 그동안에 노력하고 선을 행하고 사랑한 것에 대한 열매인데 이제는 이 숫자를 근거로 상대방을 서운해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면 그동안의 사랑과 선을 헛된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왕의 명령으로 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는 그동안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얼마나 거대한 것을 이루어냈는지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다윗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했으며, 백성에게 선을 행했으며, 자신으로 인해서 백성이 자유롭고 힘 있게 살았다는 증표이다. 그러나 숫자를 세는 순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한 것이며, 내 능력이며, 내 말을 들어야 하며, 나에게 잘해야 하는 것으로, 악한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다윗왕은 숫자를 세는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그 모든 힘으로 솔로몬 성전을 준비하는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짜 영적인 세계는 늙어서 아무것도 없을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육체의 시대가 끝나고 더 깊은 세계인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지금부터 “옛날에 내가 ~ 을 했다.”라는 과거의 숫자를 세는 일을 중단하고 숫자를 만들어냈던 예전처럼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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