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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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들이 고등학교 일학년 때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저녁 식사를 위해 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이 식당 입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제 엄마는 먼저 들어가라는 눈치였다.
 “아빠,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 여기서 이야기할래? 무슨 얘긴데?”
 아들의 얼굴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아빠! 저를 용서하실 수 있겠어요?”
 “무엇이든 용서 못할 게 없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대범하게 대답했지만 무슨 사고를 쳤나 내심 걱정스러웠다.
 “아빠! 저, 음란 사이트에 세 번 들어가 봤어요.”
 아들의 고백은 청소년기 남자아이들이 한 번쯤 빠져드는 고민이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심각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성적 호기심이 큰 청소년 시절에 흔히 있는 문제이므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죄책감을 덜어줄까 생각하는데,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아들의 고백을 들으며 내 속으로는 뜨끔했다. 아들은 세 번 봤다고 했지만 나는 그 이상 보았을 것이다. 그런 고백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아빠는 너보다 더 많이 봤지만 이야기하지 못했구나. 우리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자. 앞으로 안 보면 될 거 아냐.”
 이렇게 말했다면 아들이 나를 멋지고 화끈한 아빠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솔직하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남아 있다. 나는 내 자존심과 체면을 차리느라 훈계조로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이제 그것으로 끝내라.”
 아들은 용기를 내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내가 원치 않는 답이 튀어나왔다. 평소에 무엇이든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해놓고 정작 나는 아들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는 일탈의 즐거움을 맛보느라 하지 말라는 짓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몰래 친구들과 술집에도 가보고, 친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집단폭력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창피함을 무릎 쓰고 솔직하게 고백한 아들을 보면서 나는 세상살이에 대해 한 수 배운 느낌이었다. 뿌듯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가부장적 권위에 의해 부모 자식 간의 기강이 유지되던 시대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지도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스승으로 여기며 따라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많다.
 그날 나는 아들에게서‘용기도 힘’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용기는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진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법이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당연히‘거짓말하지 말라’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거짓말이 더 많고 심각하다. 거짓말이 많은 사회일수록 거짓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강도가 높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은 감화가 자식에게는 두고두고 교육적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위압적 가르침보다‘우리 모두 투명하게 살자’고 말한다. 시간에 투명하고, 장소에 투명하고, 생각에 투명하자는 것이다. 가족에게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려서 시간과 장소에 투명한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함으로써 생각에 투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생각에 투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투명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인격함양이라는 자기계발의 단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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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세상을 투명하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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