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천재바둑기사와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대결이 온 세상을 전율케 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이미 예견된 것이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의 중심부에서 이미 전개되고 있다. 필자는 5국을 지켜보면서 21세기 바벨탑을 생각했다. 무엇이든 만들어진 것과 만든 존재가 있다.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이고 하나님은 만든 창조주이시다. 만들어진 AI가 만든 인간을 앞서는 듯한 현상을 보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을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면서 딱 부러지게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젖어든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이 존재케 하셨고, 하나님이 정돈케 하셨고, 하나님이 번성케 하신다는 근본이치가 있다. 그 이치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은 끊임없이 그 창조의 이치를 무너뜨려보려고 한다. 구글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제작팀의 ‘하사비스’는 1승 이후에 한 말이 “달나라에 갔다”고 한 말이 가슴에 남아있다. 그런데 필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있다. 온 우주에 다 이르러도 태양에 갈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나 이해하리라.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는 말을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치가 없다. 막을 수도 없고 비켜갈 수도 없다. 그렇게 흐르고 난 시간을 역사(歷史)라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스를 그 무엇도 하나님은 인간세계에 허락하시지를 않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수(流水)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울로 보는 혜안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으면 돌아가고, 끊임없이 낮은 곳을 지향하고, 막으면 그냥 멈추어 더 막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고 흐르면서, 구름과도 이야기하고 낙엽과도 대화를 한다. 그렇게 계속 흘러 흘러간다.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준다. 마른 땅을 적시면서 온갖 잡다한 찌꺼기조차 덮어버리고 메말라 건조한 곳을 소리 없이 적셔 먼지조차도 잠재우는 신비한 힘을 갖고 흐른다. 그것이 창조섭리의 순리(順理)다. 그렇다고 물은 그렇게 순리(順理)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듯 홍수로 임하기도 하고,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역리(逆理)를 매질하듯 때로는 쓰나미(tsunami)같이 노도(怒濤)로 경계한다. 그것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다.
자연의 섭리도 그렇지만 영적 세계는 더욱 그 섭리가 경이(驚異)롭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인데, 첫 번째 아담은 그 근본의 순리를 저버리고 역리를 취했다. 그리고 어둠의 권세를 따르고 빛의 자녀로서의 옷을 벗어버렸다. 거기서부터 불법(不法), 불의(不義), 불선(不善), 불신(不信)으로 인하여 죄(罪)를 짓고 생명에서 사망으로 방향설정이 틀어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의 은총을 인간에게 베푸시고 본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함으로 창조의 섭리에 순응하게 하셨다. 그것이 교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순리의 역사가 아닌 역리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마치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현실에 동화되어 진정한 역사의 순리를 역행한다. 그 역행의 공통점이 아이러니 하다. 모두가 나는 의롭고 나는 거룩하고 나는 어제의 사람이 아닌 오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제의 사람은 미워하고 기쁨이 없고 분쟁하고 참지 못하고 증오하고 정죄하고 불충하고 사납고 오만함의 옷을 입고 있다.
오늘의 사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바로 오늘의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란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란 그 삶을 통하여 갈라디아 5:22~23절 말씀이 자연스럽게 연주되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이 부활신앙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나는 오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삶의 내용은 어김없이 어제의 사람으로 언행을 일삼으니 아이러니 한 것이다. 잠깐 멈추고 돌아보면 역리의 삶을 살면서 순리라고 하는 그것이 곧 어제의 사람인 것이다. 순리를 행하는 오늘의 사람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십자가 복음의 삶이 연주된다. 역리의 어제의 사람은 복음의 삶이 아닌 것은 카오스 현상의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면서 분쟁과 분열과 시기와 쟁투로 공멸에 이르게 되는 삶을 연주한다.
올해도 온 누리에 어김없이 부활의 은총으로 충만함을 찬송하고, 축하하고,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부활 신앙이란 값싼 언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연합회이든 부활절 행사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진정한 부활신앙이란 삶이어야 한다. 부활신앙의 삶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용서와 사랑의 말씀으로 귀결된다. 그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전부다.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복음의 삶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이 존재케 하셨고, 하나님이 정돈케 하셨고, 하나님이 번성케 하신다는 근본이치가 있다. 그 이치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은 끊임없이 그 창조의 이치를 무너뜨려보려고 한다. 구글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제작팀의 ‘하사비스’는 1승 이후에 한 말이 “달나라에 갔다”고 한 말이 가슴에 남아있다. 그런데 필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있다. 온 우주에 다 이르러도 태양에 갈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나 이해하리라.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는 말을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치가 없다. 막을 수도 없고 비켜갈 수도 없다. 그렇게 흐르고 난 시간을 역사(歷史)라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스를 그 무엇도 하나님은 인간세계에 허락하시지를 않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수(流水)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울로 보는 혜안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으면 돌아가고, 끊임없이 낮은 곳을 지향하고, 막으면 그냥 멈추어 더 막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고 흐르면서, 구름과도 이야기하고 낙엽과도 대화를 한다. 그렇게 계속 흘러 흘러간다.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준다. 마른 땅을 적시면서 온갖 잡다한 찌꺼기조차 덮어버리고 메말라 건조한 곳을 소리 없이 적셔 먼지조차도 잠재우는 신비한 힘을 갖고 흐른다. 그것이 창조섭리의 순리(順理)다. 그렇다고 물은 그렇게 순리(順理)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듯 홍수로 임하기도 하고,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역리(逆理)를 매질하듯 때로는 쓰나미(tsunami)같이 노도(怒濤)로 경계한다. 그것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다.
자연의 섭리도 그렇지만 영적 세계는 더욱 그 섭리가 경이(驚異)롭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인데, 첫 번째 아담은 그 근본의 순리를 저버리고 역리를 취했다. 그리고 어둠의 권세를 따르고 빛의 자녀로서의 옷을 벗어버렸다. 거기서부터 불법(不法), 불의(不義), 불선(不善), 불신(不信)으로 인하여 죄(罪)를 짓고 생명에서 사망으로 방향설정이 틀어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의 은총을 인간에게 베푸시고 본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함으로 창조의 섭리에 순응하게 하셨다. 그것이 교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순리의 역사가 아닌 역리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마치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현실에 동화되어 진정한 역사의 순리를 역행한다. 그 역행의 공통점이 아이러니 하다. 모두가 나는 의롭고 나는 거룩하고 나는 어제의 사람이 아닌 오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제의 사람은 미워하고 기쁨이 없고 분쟁하고 참지 못하고 증오하고 정죄하고 불충하고 사납고 오만함의 옷을 입고 있다.
오늘의 사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바로 오늘의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란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란 그 삶을 통하여 갈라디아 5:22~23절 말씀이 자연스럽게 연주되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이 부활신앙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나는 오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삶의 내용은 어김없이 어제의 사람으로 언행을 일삼으니 아이러니 한 것이다. 잠깐 멈추고 돌아보면 역리의 삶을 살면서 순리라고 하는 그것이 곧 어제의 사람인 것이다. 순리를 행하는 오늘의 사람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십자가 복음의 삶이 연주된다. 역리의 어제의 사람은 복음의 삶이 아닌 것은 카오스 현상의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면서 분쟁과 분열과 시기와 쟁투로 공멸에 이르게 되는 삶을 연주한다.
올해도 온 누리에 어김없이 부활의 은총으로 충만함을 찬송하고, 축하하고,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부활 신앙이란 값싼 언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연합회이든 부활절 행사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진정한 부활신앙이란 삶이어야 한다. 부활신앙의 삶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용서와 사랑의 말씀으로 귀결된다. 그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전부다.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복음의 삶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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