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종교보다 신앙!(눅 24:13-35)
부활의 예수님과 함께 살라!
본문은 종교와 신앙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종교적 사고, 종교적 대화, 종교적 관행들에 익숙하지만, 신앙적 사고, 신앙적 대화, 신앙적 삶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 서북쪽 12킬로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나사렛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라고 믿었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였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선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고,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끝나실 분이 아니며, 부활하실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원하신 예수님을 시간적 한계 속에 묶어 두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퍼했지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들은 바로 자신들 곁에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셨지만, 눈이 가려져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종교와 신앙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종교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느낍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이론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삶 속에서 맛봅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부지런히 찾지만 공허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알고 기뻐합니다.
종교적 교인은 <좋은 예배>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헤맵니다. ‘그 교회에는 주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던 그 교회에도 주님은 계십니다. 또 훌륭한 설교자, 웅장한 악기 연주, 잘 조화된 찬양이 있을 때, ‘영광의 주님이 임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조건에 따라 임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르겐 하나 변변히 없고, 찬양대도 없는 시골 교회에는 주님이 안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설교자, 찬양대, 악기 등의 조건과 관계없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종교는 그런 조건을 채우려고 애쓰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주님이 이미 함께 계신 줄 믿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빈들에서 잠든 야곱과도 함께 계셨고,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 곁에도 계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 서북쪽 12킬로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나사렛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라고 믿었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였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선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고,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끝나실 분이 아니며, 부활하실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원하신 예수님을 시간적 한계 속에 묶어 두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퍼했지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들은 바로 자신들 곁에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셨지만, 눈이 가려져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종교와 신앙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종교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느낍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이론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삶 속에서 맛봅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부지런히 찾지만 공허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알고 기뻐합니다.
종교적 교인은 <좋은 예배>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헤맵니다. ‘그 교회에는 주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던 그 교회에도 주님은 계십니다. 또 훌륭한 설교자, 웅장한 악기 연주, 잘 조화된 찬양이 있을 때, ‘영광의 주님이 임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조건에 따라 임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르겐 하나 변변히 없고, 찬양대도 없는 시골 교회에는 주님이 안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설교자, 찬양대, 악기 등의 조건과 관계없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종교는 그런 조건을 채우려고 애쓰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주님이 이미 함께 계신 줄 믿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빈들에서 잠든 야곱과도 함께 계셨고,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 곁에도 계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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