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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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여의도 1번지 이야기를 듣노라면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고 도대체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 그것밖에 안 되며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국태민안을 기대하기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2004년으로 기억한다. 한나라당이 만든 연극 ‘환생경제’에서 비록 연극일지라도 특정 인물을 극화하여 구사된 언어는 듣기 민망하기 그지없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저것이 선량(選良)들의 수준인가?” 싶어 TV 채널을 돌렸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야당 대표선거가 끝나자 말자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곧바로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모든 것이 그들의 탓인 양 연관된 대통령부터 사과해야 한다는 엇박자 언행이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최고위원으로 선임되자 말자 독설부터 쏟아낸 정모 의원의 말을 듣는 국민들의 마음이 불편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야 박수를 칠지 모르지만 같은 당 소속의원들조차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어 간다.”고 탄식을 하는 소리를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된다. 어디 그것이 야당 지도자들만 그런가? 여당 지도자들의 작금의 언행 보도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하나같이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진정한 의회민주주의가 죽어버린 슬픔이 나 혼자만의 아픔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슬프고 아픈 것은 왜 우리는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목이 쇠도록 외치던 지도자들로 인하여 우리들은 고통받아야 하는가이다.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고, 사회가 시궁창 냄새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仁’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仁’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정치권의 이야기라 접고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가? 가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다. 그래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 가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 해오고 있다. 많은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σ)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본보기가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위반을 하기도 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한 운전을 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교회 뒷골목에서 접촉 사고가 발생한 사건을 본 일이 있었는데 사고 차량을 세워두고 양측 운전자가 욕설을 하면서 상대방 잘못을 강조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차량에 모두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 하나는 “내 탓이오”와 하나는 “익수스”물고기 스티커였다. 왠지 나 자신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르고 수치스러운 자괴지심에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전국을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면서 가슴이 먹먹하고 고뇌스러운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오늘 교회의 가장 힘든 부분은 “네 탓”을 노래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교인들 마음이 황량한 사막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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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왜 네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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