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0(목)
 
문화1.JPG▲ 다양한 예수상
 
1. 말(言)의 복수
우화 ‘양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온다는 거짓말을 즐기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그 밥이 되고 말았다는 비극적인 소년의 이야기인데, 흔히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라는 도덕교훈을 위해 단골로 인용되는 우화이다. 인문학자인 이왕주 교수에 따르면 이 우화는 훨씬 더 심오한 언어철학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 소년은 거짓말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말의 박해 때문에 복수를 당한 것이다. 소년의 입술에서 학대당한 ‘늑대가 온다’는 말이 복수의 칼을 휘두른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다. 첫째는 말이 현실을 만들어내며 둘째는 그 현실 안에서 말이 스스로 무력해져버리는 것이다. 늑대가 나타난 것은 첫째의 증거고, 사람들이 소년의 외침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것은 둘째의 증거다.”
문제는 이 비극이 동화 속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물론이고 인간이 살았던 모든 세상에서 조금씩은 다 이 양치는 소년의 운명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를 섬기던 환관 조고(趙高)는 시황제가 죽자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리고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내세워 황제로 옹립했다. 이후 조고는 호해를 온갖 환락 속에 빠뜨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다음 교묘한 술책으로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원로 중신들을 제거하고 자기가 승상이 되어 조정을 완전히 한 손에 틀어쥐었다.
어느 날 조고는 입을 다물고 있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기 위해 술책을 썼는데, 사슴 한 마리를 어전에 끌어다 놓고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승상은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指鹿爲馬)’ 무슨 소리요?” 조고는 완강하게 말한다. “아닙니다.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제공들 보기에는 저게 뭐 같소? 말이오, 아니면 사슴이오?” 그러자 대부분 조고가 두려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나마 의지가 남아 있는 사람은 “사슴입니다.”라고 바로 대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니 누구도 감히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조고와 같은 환관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나중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유방의 군대가 서울인 함양으로 밀고 올라오는 가운데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3대 황제로 옹립했으나, 똑똑한 자영은 등극하자마자 조고를 주살해버렸다. ‘양치는 소년’과 같이 거짓된 현실을 창조한 거짓말은 지속되지 못하고 징벌의 칼날로 변하여 자신을 발화한 인간을 엄벌한 것이다. 논리적이고 감성적인 말에 의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이성과 공감과 배려의 감성이 상실되고, 난폭한 감정과 편견의 말들이 휘몰아쳤던 세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말이 있었다.
 
2. ‘발화된 말’과 ‘수육된 말(씀)’의 자기희생
역사적 기독교는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역사, 교훈과 행동 등 예수의 전 운명 때문에 생겨났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교회의 선포, 선교, 신앙 진리의 내용이고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대상으로서 예수는 복잡한 인간 이해의 범주(해석학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론인데, 다음과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예수가 기독교의 신앙과 실천의 궁극적 척도인가? 그는 쿠바의 게릴라 대장 체게바라인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빛나는 전태일인가,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투쟁가인가? 그렇다면 위대한 민중 항쟁사의 가장 큰 분수령을 이룬 전봉준은 예수인가. 민중신학자의 주장처럼 민중이 예수인가. 혹은 감상적 경건주의자와 낭만적 신비주의자가 그리는 것처럼 역사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진 피안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예수인가. 그는 영적이고 내적인 세계에만 관여하는 골방 주인인가.”
따라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말은 간단하게 표현되었지만, 기독론이라는 제목 아래, 신학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어온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고 따르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의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들려온다. 그림 <다양한 예수상>처럼 다양한 기독론과 예수상이 전통적으로 해석되어온 것이다.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는 믿고 고백하며 증거 하는가? 기독교와 기독교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그의 삶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과 그 답은 기독교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신학은 이 질문에 대해 거듭 새롭게 대답을 해야 하며, 그 대답을 통해 창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켜가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교회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도태될 것이다.
에밀 부룬너(E. Brunner)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칼 바르트(K. Barth)의 기독론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그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요한복음에 기초한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있던 말씀(logos), 곧 이성과 법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성과 법칙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셨다고 한다. 죄 없고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말의 씀’은 ‘말씀’으로 우리말에서는 공경어가 되기도 하지만, 해석학적인 작업을 거치면 이제까지 발화된 말을 귀로 듣고 실천했던 종교가 ‘말을 씀’으로 쓰여진 문서(말씀)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 찬란한 메시지로 인하여 우리는 신학적 상상력을 되찾을 수 있으며 해석학의 바다를 향하여 노를 저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향해의 목적은 쓰여진 말들의 파편을 찾는 것이다.
이제껏 진리를 찾아 헤맨 인류 역사를 김성곤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the Word)은 곧 발화(utterance)의 힘으로 천지창조를 가능케 했던 완벽한 언어/로고스이자, 절대적인 진리/신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그 말씀과 직접 교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말씀 곧, 진리는 베일에 가려졌고, 신은 인간으로부터 떠나버렸다. 그 후 인간은 그 사라져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으며 그 결과로 스스로 진리를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이 신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은 권력을 쥐고 스스로의 신념을 절대적 진리로 선포했으며, 거기에 반대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과 적 그리스도라는 죄명으로 억압해왔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의 종말(apocalypse)과 파멸(annihilation)을 재촉하는 진정한 적 그리스도(anti-Christ)는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파멸과 연관되는 이 모든 것은 A자로 시작된다. 사실 A자는 알파벳, 곧 모든 문자의 시작이자 동시에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파멸은 다시 처음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두 계층 간의 싸움과 갈등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화된 말’이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말의 씀’으로 수육(육신을 입음)되었을 때, 그 말씀의 해석(기독론)은 다양해 졌으나, 다시금 말의 씀을 단 하나의 발화된 말로 왜곡하려는 적그리스도들 때문에 차이를 존중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교리, 배타적인 신앙이, 자기 부정이란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를 이상한 종교로 만든 것은 아닐까? 사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알아낸 탓에 평생 모욕과 수난이 그칠 새 없었던 갈릴레이(G. Galilei)는 말년에 이르러 미쳐 돌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옳았고, 당대의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은 잘못했다.
 
문화2.JPG▲ 배타성의 희생자 갈릴레오, 세르베투스, 베잘리우스
 
진지한 성서주의와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친 세르베투스(M. Servetus)는 법학과 의학을 전공하며 당시 과학 저서들을 번역하고 편집한 과학자였으며 개인적으로 신학을 연구한 신학자였다. 혈액 순환설을 제창했으며 ‘유대인의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성서의 기록을 무시한 채 당시의 지리학설을 쫓은 죄로 종교 개혁자 칼뱅에 의해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담은『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1531)를 출판하여 ‘말씀’은 영원한 하나님의 자기표현 방식인 반면, 성령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활동 또는 능력이라고 주장하며 성자는 인간 예수와 영원한 ‘말씀’의 결합이라고 말했으나, 가톨릭과 개신교인들은 그의 복잡한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그리스도교 회복」(1546)이라는 글에서 세르베투스는 성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니케아 신조 때문에 모욕을 당했으며,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구속되었고 1553년 칼뱅에 의해 이단혐의로 재판 받아 화형 당했다(당시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고소하기는 하였으나 화형은 반대했다). 세르베투스를 처형한 사건은 개신교도들 사이에 이단자에게 사형을 부과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시대적 한계로 인한 장 칼뱅의 배타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1903년 세르베투스가 죽은 그 장소에 장로교 교인들은 기념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칼뱅의 후예로써 감사한다. 우리는 시대의 오류에 대해서 회개한다.”
남녀의 갈비뼈 수가 같다는 상서롭지 못한 사실을 밝힌 근세 해부학의 대부 베잘리우스(A. Vesalius)는 교리 수호에 부심했던 교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구태여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어육(魚肉)으로 변했던 여자와 흑인과 유대인의 박해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차이와 주변을 보는 시선은 이처럼 한때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백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고생시킬망정 한 명의 이단자를 놓치지 말라’는 중세 이단 심문소의 원칙처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롭고 낯선 것이란 그저 박해의 대상일 뿐이었다. 차이와 주변을 수용하는 성숙한 시대정신은 ‘발화된 말’이 ‘수육된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지평에서 수육된 말씀을 발화된 말로 교리화, 획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차이나는 수육된 말씀들을 배움의 조건으로 삼을 때 성숙한 깨침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수육된 말씀은 자기희생의 상징인 ‘유월절 어린양’이다.
사실 차이와 주변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의 지식인들에게는, 배타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지금의 지식인들에게도 ‘앎의 새로운 지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종교인들에게는 ‘성숙과 깨침’을 위한 화두가 된다. 곧, 자신의 동질성을 타자에게 강조하지 않고 타자와 자아와의 차이를 박해가 아닌 배움의 조건으로, 나아가 자기희생의 태도로 접근하는 겸손이야말로 한국 개신교가 나갈 성숙의 징표가 될 것이다.
 
3.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그 다스림
서양 최고의 고전인 호메로스의『일리아스』첫 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하자 아킬레우스는 그의 목을 쳐버리겠다며 칼집에서 칼을 뺀다. 그때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나타나 아킬레우스의 금발을 등 뒤에서 잡아당긴다. 그 순간 아킬레우스는 노여움을 삼킨다. 이성과 지혜가 분노의 불길을 제압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노래’하는 대서사시인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이러한 지혜로운 행동 때문에 역으로 ‘분노의 다스림’에 관한 시가 된다.
태초에 있었던 발화된 말, 곧 이성과 질서가 우리 가운데 죄 없고 흠 없는 ‘어린양’으로 임했다는 것은 ‘양의 희생과 이성의 제 역할’이 4?13 총선 이후 이 땅을 바로 세울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올바른 이성으로 지록위록(指鹿爲鹿)을 발화해야 할 것이며, 분노의 불길은 지혜의 손길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본은 바로 발화된 말이 말의 씀으로 어린양 예수가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인 십자가 정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따라서 인문학자의 다음의 외침은 참다운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인들의 외침도 되는 것이다.
“누가 말에서 뜻을, 이름에서 실질을 박탈했는가. 누가 언어를 떠도는 유령으로 만들었는가. 바로 양치기 소년과 같은 거짓말쟁이들이다. 기억해두자.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 진정 필요한 존재는 거짓말하는 똑똑한 지도자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양치기 소년이라는 것을.”
 
 
최병학 목사2.JPG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⑮ : 말(씀)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