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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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류소설가 한강(漢江, 1970~)이 영국의 맨부커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수상했습니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권 최초라 하니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언론은 앞 다투어 ‘낭보(朗報)’를 보도하기에 바빴고, 수상작인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 뿐만 아니라 한강의 기존 작품은 물론(『소년이 온다』) 신작까지도(『흰』)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합니다. 분명히 기쁜 소식인데, 동시에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마치 목욕탕에서 맛있게 먹었던 맥반석 구운 계란이 어딘가에 막혀서 내려가지 않는 그런 먹먹함 말입니다.
  ‘아시아 작가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 수상!’ 일반 언론이나 인터넷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문구입니다. 여기서 동전의 양면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최초집착증’입니다. ‘세계 3대 문학상’ 운운하는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 증세라고 봅니다. 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노벨, 프랑스 콩쿠르(concours), 맨부커(Man Booker)를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제정했나요? 그렇다면 스페인어로 써진 작품에 주어지는 세르반테스상(Premio Miguel de Cervantes)은 왜 이들보다 권위가 떨어집니까? 30~50대의 비교적 젊은 작가에게 주어지는 맨부커상이 화제성이나 파급효과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배제하고 영미권을 대표하는 문학상이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세상은 이러한 일종의 쇼비니즘이나 공공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외모보다는 중심을(삼상 16:7) 겉사람보다는 속사람을(고후 4:16) 더 소중히 여기는 성경적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이슈가 된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는 제목을 보고 으레 떠올릴 법한 ‘다이어트’나 ‘환경보호’와 관련된 작품이 아닙니다. 여주인공은 어느 날 꿈을 꾸고 갑자기 냉장고 안의 모든 육류를 다 치우기 시작합니다. 20년 전의 아픈 ‘기억’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기억’이 단순히 소설 속에 나타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합니다. 이 작품을 두고 ‘미와 공포의 섬뜩함’이라는 표현을 썼던 심사위원장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출세작인 『소년이 온다』에서부터 한강의 기억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맨부커 측이 하필 수상 발표를 5월 17일에 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중은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에만 환호하고, 정작 어떤 소재와 문제의식이 세계인들의 관심과 동감을 이끌어내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후자(後者)가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한강은 1980년 광주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논쟁에 가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와 체제 속에서 함몰될 수 없는 인간의 가치와 생명이 영특한 이 여류소설가가 장기(長技)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에 따라 또한 같은 생각을 하는 집단을 찾아 생각을 공유하고 의견을 발출(發出)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면서도, 막상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 교회가 많았습니다. 한강을 말하려면 광주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한강을 말하면서 광주를 말하지 않는다는 건 한강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광주를 말하기 곤란한 처지와 상황이라면, 한강에 대해서도 침묵하는 것이 더 성경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분별력과 통찰력입니다. “시세를 알고(understand the times)”(대상 12:32)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실천할 때(롬 12:1-2) 다윗과 바울의 시대처럼 교회는 다시 한 번 비상(飛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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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한강 그리고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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