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Christus”는 바울 신학의 핵심중의 하나이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이다. 그 신학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 주님은 사복음서 여러 곳에서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이렇게 나타내셨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제자들의 열매 맺는 삶과 기도 응답의 비결은 그런 관계에서 나옴을 강조하셨다. 요15:5, 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 “en Christus”가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해 핵심적인 기독교리로 신학화 되었다. 그가 여러 교회에 보내는 모든 서신서에서 “en Christus”는 수도 없이 나온다.
3년 전 성경 66권중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매일 새벽마다 묵상 중이었다. 난해하다는 책인데, 당시 묵상 중에는 왜 그리 흥미롭고, 재미있고, 은혜로운 말씀으로 읽혀지는지, 많은 은혜를 받은 적 있다. 나의 성경책, 요한계시록 빈 여백에는 이런 저런 나의 묵상의 글들로 가득 채워져 나갔다.
특히 어느 한날 새벽 묵상에서 계14:13의 말씀이 전날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과 오버랩 되면서 큰 은혜가 되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전날 오전 8시 30분, 특별한 장례예배를 인도했다. 주일 단칸방에서 심장마비사, 그 다음날 그 집을 방문한 보호인에 의해 발견, 119로 마산의료원으로 후송, 일가친척이 없음으로 빈소 없이 시신안치소에 보관, 그리고 어제 발인예배 후 화장터로 이동한 장례였다. 고인의 가난한 삶, 고독한 삶, 유별난 성격을 알기에 나의 가슴은 저려왔다. 그 자리에 참석한 10여명의 성도들의 마음도 동일했을 것이다. 故 최봉애 집사(86세), 세상적으로 보면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말년에 교회에 나와 주님과 교회와 벗 하면서 지내시다가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주안에서 임종을 맞으신 것이다. 눅16장에서 주님이 들려주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생각난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자의 인생은 부러운 인생, 거지 나사로의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주 밖에서 죽은 부자는 불쌍한 인생, 주 안에서 죽은 나사로는 행복한 인생이었다. 한가지 놀랍고 감동적인 일은 몇 주 전에 고인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셨는지 2004년부터 시작한 “성전건축매월구좌헌금”(2004년~2011년)봉투 8개를 가져 오셨다. 봉투마다 한번의 빈 공란 없이 12개월 수납도장으로 가득 찍혀있었다. 너무도 귀한 유품이었다.
오후에는 김선엽 집사의 전도로 몇 개월 전에 등록한 이순옥 성도의 시어머니(90세)가 위독하여 집중실에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감사하게도 믿는 분이시고, 아직은 소통이 가능한 상태라 다시한번 신앙을 확인 할 때에 “아멘”이라고 화답함을 보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에 해당되는 분이여서 이순옥 집사와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저녁에는 이경숙(김충기)집사의 고성에 사시는 부친(82세)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고성병원에서 진주 경상대병원으로 응급치료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시간에 이 집사와 통화의 시간을 가졌다. 전화에서 슬피 울며 들려오는 첫 마디는, “목사님, 지금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동생들은 다 전도했는데 여태껏 아버지를 전도하지 못했어요. 그것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살아 생전에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며 중요한 것인가를 아는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의 이유다. 다음날 아침 전화통화에서 지난 밤 사이에 별세하여 마산 영락장례식장에 안치되고 남동생 부부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장례를 주관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3년 전 성경 66권중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매일 새벽마다 묵상 중이었다. 난해하다는 책인데, 당시 묵상 중에는 왜 그리 흥미롭고, 재미있고, 은혜로운 말씀으로 읽혀지는지, 많은 은혜를 받은 적 있다. 나의 성경책, 요한계시록 빈 여백에는 이런 저런 나의 묵상의 글들로 가득 채워져 나갔다.
특히 어느 한날 새벽 묵상에서 계14:13의 말씀이 전날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과 오버랩 되면서 큰 은혜가 되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전날 오전 8시 30분, 특별한 장례예배를 인도했다. 주일 단칸방에서 심장마비사, 그 다음날 그 집을 방문한 보호인에 의해 발견, 119로 마산의료원으로 후송, 일가친척이 없음으로 빈소 없이 시신안치소에 보관, 그리고 어제 발인예배 후 화장터로 이동한 장례였다. 고인의 가난한 삶, 고독한 삶, 유별난 성격을 알기에 나의 가슴은 저려왔다. 그 자리에 참석한 10여명의 성도들의 마음도 동일했을 것이다. 故 최봉애 집사(86세), 세상적으로 보면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말년에 교회에 나와 주님과 교회와 벗 하면서 지내시다가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주안에서 임종을 맞으신 것이다. 눅16장에서 주님이 들려주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생각난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자의 인생은 부러운 인생, 거지 나사로의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주 밖에서 죽은 부자는 불쌍한 인생, 주 안에서 죽은 나사로는 행복한 인생이었다. 한가지 놀랍고 감동적인 일은 몇 주 전에 고인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셨는지 2004년부터 시작한 “성전건축매월구좌헌금”(2004년~2011년)봉투 8개를 가져 오셨다. 봉투마다 한번의 빈 공란 없이 12개월 수납도장으로 가득 찍혀있었다. 너무도 귀한 유품이었다.
오후에는 김선엽 집사의 전도로 몇 개월 전에 등록한 이순옥 성도의 시어머니(90세)가 위독하여 집중실에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감사하게도 믿는 분이시고, 아직은 소통이 가능한 상태라 다시한번 신앙을 확인 할 때에 “아멘”이라고 화답함을 보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에 해당되는 분이여서 이순옥 집사와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저녁에는 이경숙(김충기)집사의 고성에 사시는 부친(82세)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고성병원에서 진주 경상대병원으로 응급치료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시간에 이 집사와 통화의 시간을 가졌다. 전화에서 슬피 울며 들려오는 첫 마디는, “목사님, 지금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동생들은 다 전도했는데 여태껏 아버지를 전도하지 못했어요. 그것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살아 생전에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며 중요한 것인가를 아는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의 이유다. 다음날 아침 전화통화에서 지난 밤 사이에 별세하여 마산 영락장례식장에 안치되고 남동생 부부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장례를 주관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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