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06(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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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길 갈망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21절 끝의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는 말씀과 24절 후반부의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입니다. 이 말씀은 안디옥교회의 부흥을 보여줍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흩어진 성도들이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성도들이 안디옥에도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안디옥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흥이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나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이런 부흥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첫째 <주의 손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21절에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좋은 조건도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에서 부족해도 주의 손이 도우시면 엄청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복음 지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한국교회는 안디옥교회처럼 부흥할 것입니다.
둘째는 아름다운 협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보내 그들을 도왔습니다. 본래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로서 이방인들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와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지도자였던 베드로의 고넬료 전도의 경험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열었고, 이들은 안디옥 소식을 들었을 때 기꺼이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만약 안디옥의 소식을 듣고도 예루살렘교회가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이런 복된 결과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셋째는 귀한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합류하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온 이후에는 <이게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폭발적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잘 되고 있던 곳을 백배나 더 잘 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을 가지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24절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입니다. 만약 저를 보고 바나바를 소개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요, 게다가 성품도 착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 충만과 믿음 충만을 최고로 여기면서 성품은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오히려 바나바가 <착한 사람>임을 더 먼저 언급하였습니다. 여기 <착하다>로 번역된 <아가토스>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라고 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대부분은 성품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신학교 시절 선배 목회자들을 통해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많이 들은 바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적 측면 못지않게 인품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에는 성품의 변화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세상으로부터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그 후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부흥을 가져오는 일꾼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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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성령과 믿음보다 앞선 것(사도행전 11장 19-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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