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6(금)
 
“기억하라! 진실하게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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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1984년 유고슬라비아 군대에서 당했던 심문의 기억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한다. 정보장교 G대위의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미국인과 결혼하고 서구사회에서 공부했으니 스파이가 틀림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빨리 실토하라고 다그쳤다.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자, 갑자기 심문을 멈추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심한 고문을 받지는 않았으나, 제대한 이후에도 그때 받은 학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G대위는 저자의 마음속에 편안히 자리 잡고서 거듭거듭 그를 심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겨우 그를 한구석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G대위가 비록 가해자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화해해야 그 악연이 해결됨을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기억하라!”고 말한다. 기억하더라도 진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가 내게 행한 악행을 피해자가 진실하게 기억하는 것에는 이미 그 악행에 대한 정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정죄는 심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해의 한 요소이다.
저자는 기억이 구원의 수단이 되려면, 기억 자체가 구속(救贖)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 《기억의 종말》 || 저자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현재 예일 대학교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예일 신앙과문화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배제와 포용》 《베풂과 용서》 등이 있다. 원제 The End of Memory. 홍종락 역. IVP, 2016. 16,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는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15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을 기준으로 할 때 OECD 국가 중에서 5위였다. 우리보다 갈등지수가 높은 나라는 터키를 비롯해 그리스, 칠레, 이탈리아였다. 2010년에는 2위였다.
 
#먼저 정죄해야 ‘진정한 화해’ 가능해
김길구 : 오늘 이야기할 이 책의 주제는 다소 묵직합니다. 피해에 대한 기억과 용서, 그리고 화해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위안부 문제, 옥시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이 갈수록 증폭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 지난 6월 26일은 UN이 정한 ‘고문 생존자/피해자(victims) 지원의 날’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지켜온 이 날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코피 아난 UN사무총장)입니다. 나쁜 권력에 고난을 당한 기억은 한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립니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날인 것 같습니다.
김수성 : 저자가 겪었던 ‘심문의 기억’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기억났습니다. 저자가 심문을 당했던 해가 1984년이었고, ‘빅 부라더’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거짓 기억이 동원되었고, 날조한 역사를 새로 써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길구 : 당시 유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을 겪을 때였습니다. 결국 1991년 연방이 붕괴되면서 내전을 겪었고, 인종청소라는 추악한 역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렇듯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던 분쟁지역에서 평화신학을 공부했고, 화해를 주장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김현호 : 시대적 갈등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에 일조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화해 문제를 뛰어난 통찰력으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북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진정한 화해를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회가 이념을 떠나 서로를 이어주고 만나게 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김수성 : 저자는 무조건적인 화해만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정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원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즉, 정죄할 것은 정죄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진정한 화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김길구 :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 문제는 물론이고, 세월호 사고와 최근 부각된 옥시 사건 등 다양한 사회적 갈등도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계가 갈등의 당사자가 아닌 화해자 역할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사진2.jpg▲ 화해는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에는 정죄가 포함된다.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함에 힘입어 용서가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기억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 출처: zesukchon.com]
 
#‘값싼 은혜’로 진실 봉합해서는 안돼
김수성 :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하게 기억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동안 심리학적으로 많이 연구된 기억과 관련된 문제점을 적시합니다. 소위 ‘거짓기억증후군’으로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억하는 것에 주의하라고 강조합니다.
김현호 : 현재 우리나라에서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증폭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정부나 기관에서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고 하고, 불리한 것은 덮어두려고 하는 것이죠. 세월호의 경우, 사고가 발생한 원인이나 구조상의 문제점 등은 덮어두고 보상금만 내세우며 이제 그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빨리 잊기를 원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김길구 : 저자의 말처럼 악행의 기억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무관심을 낳을 수도,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여기에 더하여 ‘정의롭게’ 기억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진리인 것 같습니다. 자기합리화로 기억을 왜곡하려 해서는 상처가 곪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불거진 옥시 문제도 비슷합니다. 배상금만 지급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엿보입니다.
김현호 : 교회에서 죄에 대한 회개는 철저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는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부 교회에서는 ‘은혜롭게’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사회적 갈등이 빨리 봉합되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봉합은 그냥 숨기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언급되었던 ‘값싼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이고, 서로가 화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물쭈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정죄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죄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고, 용서 없이는 치유도 화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길구 : 여기서 우리가 ‘사과의 기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구체적으로 보상하는 단계를 거칠 때라야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성 없이는 사회적 갈등 해소 못해
김현호 : 저자는 진정성에 더하여 십자가의 죄사함을 내세우며 모두가 화해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자발적 용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대속하심에 힘입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적 용서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 이 책에서는 기억과 용서, 망각 등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많이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십자가 보혈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러한 행위 모두가 불완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가 불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김현호 : 우리 사회에는 앞으로도 갈등이 불거질 소지가 많습니다. 세대 갈등을 비롯하여 양극화에 따른 소득 갈등, 다문화가족의 급증으로 인한 갈등 등. 그만큼 교회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정부 등에서 기왕에 벌어진 갈등을 빨리 잊을 수 있도록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그 상처를 감싸주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수성 :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우리의 몸과 영혼이 피폐해질 수는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이다. 때로는 폐허가 된 성전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성한 공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한 지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길구 : 진실하게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불의를 행하는 것이고, 잘못된 기억은 오히려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 사회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우리 사회에도 화해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을 구속(救贖)해야만 합니다.
다음에는 최병성 목사의 포토 에세이 《길 위의 십자가》(이상북스, 2016)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화해의 제자도》 / 에마뉘엘 카통골레 / IVP
《왜 용서해야 하는가》 /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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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양읽기 16] 진정한 화해는 십자가 아래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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