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2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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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에게 탄생하신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본문을 통해 성탄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란 질문은 <전한 내용이 쉽게 믿기 힘든 것인데, 이 메시지를 누가 믿겠는가?>라는 말로 이해됩니다. 즉 전한 내용이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전해진 메시지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이상한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1절 후반부에 보면 또 하나의 질문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뇨?>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임했을까요?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는 어떤 능력이 임했을까요? 일반적으로 능력이란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무명한 사람을 유명하게 만들고, 볼품없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힘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임한 능력은 이런 일반적인 능력과는 너무도 다른 <이상한 능력>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 이 능력이 임한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보좌에 계신 분이었는데,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 중에 오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탄생이지요. 그 후 예수님께서는 <약한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으시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은 분입니다. 또 예수님은 <인기 없는 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셨고,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고 했으며, 귀히 여기지 않는 분이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배척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간고를 겪으셨습니다. 결국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게 예수님께 능력이 임한 결과였습니다. 예수님께 임한 능력은 낮아져서 고난 받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이게 능력이라면, 그래서 이 능력을 받은 후 예수님처럼 된다면 누가 능력을 사모하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 임한 능력은 참 이상한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능력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께서 <요즘 얼굴 좋다>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주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라고 했는데, 자신은 잘 먹고 편안해서 얼굴이 좋아 보이다니, 주님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아픔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주님처럼 <고운 모양이 없는> 목사, 주님의 뒤를 따르는 수고와 헌신으로 거룩한 피로가 쌓이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최소한으로 입고, 최소한으로 먹고, 최대한으로 사랑하고, 최대한으로 헌신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 당시 어떤 목사님께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셨습니다. 차례가 되었을 때 불려나간 목사님은 순교를 각오하고 <난 목사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심문관이 <목수 동무? 손 좀 봅시다.>라고 하더랍니다.시 목사님은 예배당을 짓느라고 막노동을 해서 손이 엉망이었습니다. 심문관은 <동무, 인민의 친구답게 열심히 일해서 손이 엉망이구만. 자 가시요!>라고 했답니다. 목사님께서는 심문관의 귀에 역사하서서 <목사>를 <목수>로 알아듣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두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충성할 것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고운 모양이 없었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이 없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고 짐승에 태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짐승의 고삐를 잡고 터덜터덜 걸어야 했고, 그 사랑의 과정에 <거룩한 피로>가 쌓였습니다. 거룩한 피로를 느끼는 삶, 고운 모양 따위엔 관심 없는 삶,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입니다. 우리를 위해 낮아져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한국의 성도들이 이런 능력으로 무장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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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이상한 능력 (이사야 53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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