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칩니까?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의원에 관해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래 노회찬이라고 그럴 때 그게 노나라 노(魯) 자예요. 그 노나라가 공자 나라라고요. 그래서 노회찬을 항상 보면 공자같이 생겼다. 사람이 너그럽고 좀 품위가 있게 넓게 생겼잖아요. 참 공자 같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내가 항상 했고. 회(會) 자라는 게 항상 사람을 모은다 그런 의미겠거든요. 이문회우(以文會友)라든가 그런 우리 동양의 고전에도 그런 말들이 많지만. 사람을 주변으로 잘 모으고 그리고 그들을 아주 설득시키는 데 귀재고.”
노나라의 공자와 같이, 진보 정당의 원내 정당 진입을 위해 힘써 왔고, 그럼으로 약자들의 목소리가 법을 통해 제대로 대변되기를 힘썼던, 그렇게 사람들을 모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는 도올 선생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특징이 말이죠. 우리 시대의 예수라고 생각했어요.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라는 사람은 입 뻥긋 하면 다 비유였다 그러거든.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든가 겨자씨의 비유라든가 수없는 비유가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비유라든가 이 모든 그 수많은 비유를 쓰는 데 사실 달인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를 못하고 그게 무슨 하늘의 무슨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데 예수가 그 비유의 달인이었다는 의미는 예수가 바로 ‘민중의 언어’를 쓸 줄 알았다는 거예요.”
촌철살인의 비유, 오늘날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면 울고 갈 비유들이 노회찬 의원의 입에서 나왔다. 가령, 문재인 정부의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에 노의원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정확한 얘기죠. 아니, 동네파출소가 생긴다고 하니까 그 동네 폭력배들이 싫어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2. 모기들의 대한민국, 번아웃 당하다!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사, 2014)에서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국사회는)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이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사라져가는 곳’이며,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유신 때보다 더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라고 말한다(물론, 이것은 촛불혁명 이전의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촛불혁명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러한 모기들의 대한민국에서 인간들은 번아웃 당한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은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모든 에너지가 소모돼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 완전한 소진을 의미한다. 대체로 능력을 인정받고 근면 성실한 사람일수록 일을 마다하지 않기에 번아웃에 빠질 확률이 크다. 이러한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문명의 질병’이다. 수익 갈증에 따른 고강도 생산체제, 늘어나는 노동시간, 갈수록 심화되는 무한 경쟁,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와 피로는 현대인을 방향 상실로 몰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번아웃은 인간과 노동이 맺고 있는 풍요로운 관계를 앗아가고, 그 자리에 의미 상실이라는 커다란 공백을 남겨 놓는다. 단순히 고된 노력에 대한 성취감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일에 대한 의미마저도 파괴하는 것이다. 사실 명예는 빼더라도 ‘권력과 황금’의 곁에 다가서기 위해, 이 과열 시스템에 동참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로와 추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왕 모기들은 번아웃으로 노동자들을 탈진시키고, 더 나아가 해고시킨다. 아직도 쌍용차 해고 노동자 100여명을 복직시키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거스리지 않고 싶은 기업의 논리이다. 시인 노혜경의 말처럼, “1997년 현대자동차가 시작한 구조조정이 2009년 쌍용차로 완결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대통령은 몰아낼 수 있어도 노동자를 복직 시킬 수 는 없다. 인간의 노동 대신 기계와 금융이 지배하는 산업구조에서 사람이 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왕 모기들에게 뜯기는 대한민국이다.
다시 도올 선생의 외침을 들어보자.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이 노회찬의 목소리라고 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했는데, 그게 원어로는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생각을 바꾸라는 건 뉘우치라는 게 아니라, 너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좀 돌려라. 시각을 개조해라. 왜? 네가 개조하면 바로 천국이, 누구에게든지 천국이 온다. ‘kingdom of God is at hand’ 가까이 있다는 말이죠. 그거는 생각을 바꿔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사회 진보를 위해서 대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최저임금 문제든 모든 걸 다 해결됩니다. 정권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지금 이 대기업들의 횡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기들이 생각을 바꿀까? 회개할까?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쉬울 것이다.
3. 자유로운 기술과 행위, 그리고 협력
임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산물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기술’에 관해 ‘봉사적 기술’과 ‘자유로운 기술’, 두 가지로 구분한다. 봉사적 기술은 ‘물질적 산물의 생산과 관계하며 욕구에 봉사하는 기술’이다. 기계론적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학습과 반복적 연마를 통해 숙련이 가능하다. 이러한 기술의 가치는 생산의 유용성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장인적 기술, 수공업적 기술, 기계적 기술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자유로운 기술’은 ‘목적을 그 자신 속에 가지며 그리하여 그 자체로서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는 기술’이다. 곧,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기술을 뜻한다. 따라서 칸트는 “예술의 목적은 물질적 욕구에 대한 봉사도 아니고, 어떠한 철학적 종교적 관념에 대한 봉사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기술이 꽃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첼로를 사랑했던, 그리하여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 정도는 연주할 줄 아는 세상을 꿈꾸었던 고(故) 노회찬 의원의 미학적 정치의 멋도 깃들어 있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미적 예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합목적적인 표상 방식이며, 비록 목적은 없다 해도 사회적 전달을 위한 심의능력들의 문화를 촉진시키며, 이러한 미적 대상(표상)의 합목적성은 자의적 규칙들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마치 순수하게 자연의 산물인 듯 보여야 한다.”
예술은 자유로운 기술로서 과학적 인식의 법칙과도 무관하며 심지어 회화의 기하학적 법칙과 음악의 수학적 법칙으로부터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적 예술은 필연적으로 천재의 예술이다. 천재는 예술작품을 통해 미를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취미가 미를 판정하는 능력이라면 천재는 미를 산출하는 능력을 가진 이다. 예술작품은 ‘자유로운 기술’의 소산이기에 천재는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 없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한다. 봉사적 기술이 요구되고, 노동이 소외되고, 인간이 기계화되는 이때 노회찬이 그리던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을까?
구약성서의 노동 개념 두 가지인 아보다(aboda)와 멜라카(melaka)는 각각 ‘봉사’와 ‘보내심’에서 유래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신에 대한 봉사’와 ‘신적 위임으로 보내심’이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적인 노동관인 ‘자연의 질서, 숙명, 고통’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인간이 그의 노동으로 참여하는 동역의 의미인데, 이러한 동역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에 위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20)” 하와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노동과 공동체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은 공동체 내에서 자기 동일성의 실현이 된다. 결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경쟁이 아닌 것이다. 자유로운 기술에 기반한 협동과 공동 참여라는 노동, 자연에 대한 착취와 지배가 아닌 공존과 돌봄이라는 노동은 언제 가능할까?
독일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한길사, 2017)에서 노동과 작업, 행위 3가지로 인간의 활동 유형을 나눈다. “‘노동(labor)’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해 행하는 육체의 동작이고, ‘작업(work)’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일의 재미와 일정한 명예를 바라며 수행하는 제작 활동이며, ‘행위(action)’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넘어 공동체 속에서 어떤 대의를 위해 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면, 직장에 다니는 목적이 단지 봉급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노동일뿐이며, 그 일에서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면 작업이 된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에 짬을 내어 봉사활동을 하거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를 놓고 시위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은 ‘노동’조차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노동이 행위로 바뀌기 까지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걸까?
『협력하는 종: 경쟁하는 인간에서 협력하는 인간이 되기까지』(한국경제신문사, 2016)에서 새뮤얼 보울스&허버트 긴티스는 이렇게 말한다. “협력에 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많은 실험 및 증거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는 설명은, 사람들이 비슷한 심성을 갖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거나 또는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 의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타인의 협력에 무임승차해 이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처벌함으로써 기뻐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도덕적인 의무로 여긴다. 무임승차자들은 때때로 죄의식을 느끼며, 타인들에 의해 제재를 받을 경우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들을 모두 묶어 사회적 선호(social preference)라 부른다.”
진화생물학과 진화게임이론 연구 결과, 사람들이 이타적 협력을 지속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적 선호’ 때문인데, 이것은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선호란 사람들이 비슷한 심성을 갖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기쁨이나, 협력에 대해 느끼는 도덕적 의무감, 또는 협력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의 죄의식이나 제재를 받을 경우 느끼게 되는 수치심 등의 감정을 뜻한다.
사회적 선호가 확산될 수 있는 이유는 제도를 만들고 학습된 행위를 문화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공교육은 무너졌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남자의 일생’은 이렇다. 세 살 때는 신동, 예닐곱 살 때는 천재, 초등생 때까지도 수재, 입시 한두 번 겪으면 범부, 사회 나오면 둔재! 교육환경이나 훈련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의 인지능력과 성취감이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데, 제대로 된 공교육이 무너진 대한민국은 아직도 학과 점수에 아이들을 길들이고 있다. 그 결과 무임승차자들은 죄의식이 없고, 당당하다. 따라서 자유로운 기술을 통하여 행위하는 인간들의 협력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우리들의 대한민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4.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리들의 대한민국
박노자의 대한민국은 이렇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정당들이 국회 의석을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입사 때 여성이나 장애인이 ‘정상적인 남성’보다 더 유리한 평등의 나라, 노동운동가들이 감옥에 잡혀가지 않는 나라, 학생들이 교수를 만날 때 노르웨이처럼 동등한 인간으로서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는 나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각종 원조를 제공하는 일이 덴마크처럼 지성계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 나라, 여성들이 손님의 냉면을 잘라주는 ‘음식집 아줌마’ 정도의 역할밖에 맡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 그런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실존적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인… (다시) 좌파의 길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른바 비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대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는 것이다. 자본의 한계를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닌 폐허를 딛고 일어나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의 힘’만 있다면 못 이룰 것도 없다. 따라서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참사가 계속 일어나도 아무런 투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역사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일일 것이다.”
서론에 언급했던 노회찬 의원은 그 길을 가다 넘어졌다. 그의 유언은 이렇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에 동지 하나를 잃고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이 올려지건만, 그리 힘들지 않음은 그의 웃음과 해학이 예수의 그 마음에 닿기에, 예수의 부활처럼 그도 부활하리라 생각하여 오늘도 당당히 앞으로 걸어간다. 노회찬 의원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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