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펼치기] ‘1984’에서 ‘멋진 신세계’로?
인터레그넘 시대
1. 인터레그넘 시대의 불안
21세기 현재 세계화 시대를 가리켜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터레그넘(interregnum, 최고지도자 부재기간)의 시대라고 말한다. 성서의 역사 가운데는 출애굽(과 사사시대까지) 시대로 볼 수 있다. 로마법에서 사용된 일종의 권력 이양기를 뜻하는 용어로 ‘지금까지 통치하던 왕이 사망했는데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기간’을 의미한다. 애굽왕의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왕(사사, 혹은 사울과 다윗 왕 등)이 나타나기 전까지 일종의 체제 변화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변화, 혹은 권력 이양기가 현재 세계화 시대에는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화는 영토, 국민, 주권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 중심의 질서를 해체했다. 세계시장과 자본권력이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정치적 제도와 국민의 주권적 힘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인터레그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 혹은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은 묻지 않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경제가 죽어가는 것처럼 조장하는 현상, 부동산 과열문제, 교육 현장 붕괴 및 학벌 사회의 문제 등에 관해 자본 권력과 결탁한 언론 권력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불합리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가의 제도는 물론, 국민의 주권적 힘은 이를 마냥 쳐다만 보는 기이한 현상에 놓여있다. 인터레그넘 시대에 사람들은 저 창밖으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불안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라캉의 지적 유산을 계승한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불안들』 (후마니타스, 2015)에서 세계화 시대, 혹은 후기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탈근대적 주체들의 불안을 분석하며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불안이란 주체가 사회적 기대와 관련해 겪는 내면의 동요이다.” 명확한 현실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가 광기에 빠져 (가짜 뉴스는 이 광기의 시작이다) 이상한 비상식을 권유할 때 주체는 탈근대(획일성이 사라진 사회)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동요를 겪는다는 것이다.
사실 미디어는 끊임없이 위험들을 경고하고, 언론은 불안을 고조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제약회사들은 온갖 항우울제를 팔아 번창하고, 기업들은 쇼핑으로 불안을 가라앉히라고 유혹한다. 이것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자본주의적 모더니티의 절정인 19세기의 파리를 “판타스마고리아의 수도”라고 불렀던 것의 귀환이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환영 또는 환상)는 카메라가 발견되기 전, 다양한 환영들을 볼 수 있는 기계인데, 벤야민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런 기계장치에서 현실의 사회적 과정을 분석하며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다. 가령,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환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가에 주목하고, 환영 이미지를 생산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본 권력(과 결탁한 언론 권력)이 평범한 일상과 상식적 인간에게 판타스마고리아를 주입하여 구별짓는, 구별짓기의 발생사를 파헤치는 일이다.
2. 자본(언론) 권력의 구별짓기 네가지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는『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새물결, 2005)에서 4가지 자본을 소개한다. 곧,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으로 나눈다. 사실 부르디외는 발터 벤야민과 유사하게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경제적 자본논리(경제자본)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물론 경제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힘이 있긴 하지만,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문화자본은 가정환경이나 가정교육을 통해 개인에게 내면화된 고급스런 취향 및 언어능력, 인지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위나 학벌이 여기에 해당 된다. 곧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한다.
둘째, 사회자본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상징자본, 곧 사회관계자본은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다. 곧, 서울대 출신이나 판사, 검사, 의사처럼 실제 가치보다 높이 평가되고 과도하게 명예, 위신을 누리게 해 주는 상징적인 힘(정당화 메커니즘)을 뜻한다.
물론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이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가 경제자본인 돈만으로 위 세 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이 되며 상류계층이 하류계층과 자신을 구별하는 구별짓기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신흥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Habitus,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인간 행위를 상징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한다. 이러한 아비투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이다. 즉, 아비투스는 복잡한 교육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사회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교육을 통해 상속된다), 특히 미적 취향을 공유할 수 없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미적 취향이 상류사회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 곧,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흥부자들은 겉으로는 상류계급의 미적취향을 끊임없이 흉내 내려고 노력한다.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하류계급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지금은 아니지만)골프나 고가의 외제 승용차, 핸드백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싼 명품을 구입할 때,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따라서 명품 차와 가방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니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구별짓기라는 것을! 그러나 오늘날 미디어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라, 미디어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따르라 한다. 상류층을 모방하도록 조장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준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옷을 입은 것이다.
3. 『1984』와 『멋진 신세계』
미디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로 마샬 맥루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닐 포스트먼은『죽도록 즐기기』(굿인포메이션, 2009)에서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에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라고 말한다.
텔레비전 주도의 ‘쇼비즈니스 시대’는 인쇄매체 시대에 가능했던 이성적인 사회적 담론이 죽어가고 있다고 경고한 포스트먼은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 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문화의 사멸은 필연적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닐 포스트먼은 조지 오웰보다는 앨더스 헉슬리가 옳다는 입장이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외부적 압박)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한다. ‘1984’에서 우리는 외부나 압제에 지배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누군가 서적을 금지시킬까 두려워했다. 정보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통제로 인해 문화가 감옥이 될까 두려워했다.” (영화 <1987>은 이런 맥락에서 『1984』와 통한다.)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즐거움’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차고 넘쳐 나는 정보와 지천에 깔린 오락거리로 인해 사고능력이 저하된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굳이 서적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지나친 정보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 봐 두려워했다. 서구 민주사회가 춤추며 꿈길 속을 헤매다 스스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 나란히 속박 당하게 되리라 확신했다. 모순에 무감각하고 기술이 주는 재미에 중독된 대중에게 아무 것도 감출 필요가 없음을 간파했다.”
사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말이다. 따라서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기에, 디스토피아는 ‘어두운 미래 또는 현실’이 된다. 커지는 빈부격차와 취업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해법이 보이지 않는 교육·부동산 문제 등을 배경으로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와 담론에서 디스토피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어려웠지만 앞날에 대해선 낙관적이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물론 고통스러웠지만)의 역동감 있는 문화 콘텐츠와 상반되는 문화적 흐름이다.
포스트먼에 의하면 디스토피아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체제 디스토피아, 인간 디스토피아, 문명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체제 디스토피아는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억압적인 체제’와 관련된다. 국가와 거대자본은 물론이고, 실생활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분야가 그 대상이 된다.
인간 디스토피아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환멸로 인한 디스토피아이다. 미시적이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문명 디스토피아는 현대 문명의 비관적인 전망과 연관돼 있다.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새 전염병, 외계인의 습격 등이 단골 소재가 된다.
지금 우리는 ‘체제 디스토피아’의 위기를 간신히 넘어 인간 디스토피아와 문명 디스토피아로 넘어가는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살고 있다. 1984(우리에겐 ‘1987’과 ‘촛불혁명’)을 넘어가지만 멋진 신세계가 이상하게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불행한 디스토피아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연민이 창밖으로 기어들어오는 불안의 뒤를 잇기에 아직 우리 인터레그넘 시대는 희망이 있다.
4. 연민, 구원의 세례 요한
정치 철학자인 시카고 대학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주요한 ‘인간의 기능적 능력 십계명’을 작성한 바 있다.
1. 생명(life): 정상적인 수명까지 살 수 있을 것. 2. 신체적 건강(bodily health): 좋은 건강에는 적절한 영양 공급, 적절한 주거, 건강한 재생산 기능을 포함한다. 3. 육체적 완전성(bodily integrity): 자유로운 장소 이동, 주권자로서 취급될 신체적 경계선을 지킬 것, 즉 성적 학대,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가정 내 폭력, 성적 만족과 임신의 문제에서 선택권을 가지는 문제를 포함하여 폭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을 것. 4. 감각, 상상력, 사상(senses, imagination and thought): 상상하고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는 감각 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길이고, 이 길은 적절한 교육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이며, 결코 문자 위주의 기본적인 수학적, 과학적 훈련에 한하는 것은 아니다. 5. 감정(emotions): 자기 자신의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질 것,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것. 6.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 선 관념을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는 데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참여할 수 있을 것(양심의 자유 포함). 7. 협력 관계(affiliation):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고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인정하며 여러 형태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참여할 것. 8. 자연적 환경(other species): 동물, 식물, 기타 자연 세계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 것. 9. 놀이(play): 웃고, 놀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을 것.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정치적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정치적 선택에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물적·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 기회를 통해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을 것.
여기서 연민에 관해 중요한 인간의 기능적 능력은 4~7계명이 된다. 감각과 감정을 통하여 실천 이성으로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기능이자 연민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하게 누스바움은 연민이 발현되기 위한 조건 네 가지를 말한다. “첫째, 상대방의 고통이 충분히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그 고통이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유발된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고통이 나의 삶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넷째, 그 사건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연민의 발현을 방해하는 세 개의 병리학적 감정에 대해서도 누스바움은 “첫째, 수치심은 자신의 잘못된 감정에 빠져 그가 자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둘째, 질투는 타인의 성취에 눈멀어 타인의 상실과 슬픔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셋째, 혐오감은 우리와 그들을 임의적으로 갈라 그들을 증오하도록 만든다.”라고 말한다.
‘나의 삶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타인이 다른 타인에게 끼치는 충분히 심각한 고통’(가령, 이웃집에 강도가 들어 우리 집도 안전하지 못할 때)에 대해서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만, ‘수치심과 질투, 그리고 혐오감’(가령, 이웃집 사람에 대한 관계)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민만 있고 공정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남을 돕지 않을 것이요, 공정하나 연민이 없으면 타인을 위할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정과 연민은 양립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공정함과 연민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즉 이성과 공감이 함께 작용할 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많은 이들이 연민을 상실하고, 판타스마고리아에 빠져 살고 있다. 연민의 구원 열차가 지금 ‘1984’를 넘어 판타스마고리아의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기적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다.
출애굽의 목적이 가나안이었다면, 가나안에서의 삶의 목적은 연민과 공정의 평등 공동체였다. 이것을 상실한 이스라엘은 다시 바벨론의 포로로 고통을 받았다. 올바른 목적이 없을 때 그 고통은 이토록 심각하건만, 우리는 이 과도기 시대에, 인간과 문명 디스토피아 시대에 목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정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어린왕자도 이렇게 충고했다. “사람들은 모두들 똑같이 급행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지만 무얼 찾아가는지는 몰라. 그러니까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고 제자리만 빙빙 돌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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