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액괴의 시대와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
요즘 딸아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 중 단연 으뜸인 것은 ‘액괴’이다. ‘액체괴물’의 줄임말이다. 액괴를 주무르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는가 보다. 액체는 형태가 없는 무정형의 물질이다. 물과 같은데, 쏟아지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이러한 부드러운 무정형의 물질을 갖고 노는데, 어른들의 세계는 지금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로 국가, 자본, 군사력, 경제력이라는 견고한 정형(solid)의 힘이 맞대결하고 있다.
현재 미-중 경제 대결이 유예되기는 했지만,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트럼프라는 기이한 인격의 소유자가 벌리는 일이 아닌, 그 이면의 다층적인 그룹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사IN>의 이종태 기자는 그 세력들을 이렇게 분석한다. “오래전부터 중국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를 주장해온 ‘보호무역파’, 관세 인상 자체엔 회의적이지만 중국의 무역 행위를 공정(fair)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유무역파’, 중국이 미국의 글로벌 패권과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는 ‘군부와 정보기관’, 중국산 수입품 때문에 일자리 보전에 위협을 느끼는 ‘노동조합’, 중국공산당의 여론 탄압과 불법적 인신 구속에 분노하는 ‘인권 및 환경운동 진영’까지 느슨한 ‘반중 연합’에 발을 걸쳤다.”
그럼 중국은 어떤가? 지금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중국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 인권 보장 등 미국이나 한국, 서구 유럽 등이 갖고 있는 민주적 가치가 없다. 특히 시진핑 시대 이후 중국은 ‘아시아 인프라 은행’,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육·해상 신실크로드 경제권을 형성하고자하는 중국의 국가전략)’, ‘위안화 국제화’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미국을 꺾고 중국의 의지를 세계적 차원에서 관철시키고자 한다. 결국 미-중 대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대결이 아닌, ‘시장’ 자본주의인 미국과 ‘국가’ 자본주의인 중국의 자본의 힘 대결이라는 것이다.
이 대결에서 미국이 이기면 ‘팍스 아메리카’는 좀 더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중국이 버틴다면?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체제가 유지될 것이다. 혹, 이 전쟁에서 중국이 이긴다면 이제 ‘팍스 차이나’가 다가 올 것이다.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가 날개를 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유동하는(liquid)’ 액체의 이미지를 통해 성찰한 사회학자가 있다. 현대성 이론의 대가인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그는 이론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주제들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지금, 여기’를 묻는다.
2. 액체근대, 그 유동성에 관한 우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삶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 불안, 자유, 빈곤, 도시, 공동체, 진보, 유토피아 등에 관해 살펴보며 근대를 “유동적 근대(liquid modern age)”로 호명한다. 쉽게 말하면 ‘액체 근대’라는 말이다. 근대성이 가진 특성이 액체성, 곧 유동성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신비성을 액체근대라는 말로 제거해 버린 바우만은 『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2010)라는 책에서 액체근대의 5가지 특성을 잘 정리해 준다. 우선, 근대성이 ‘견고한(solid) 국면에서 ‘유동하는(liquid) 국면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나, 일상적인 일들과 용인될 만한 행동 양식이 반복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제도들과 같은 사회적 형태들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또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여건으로 변해 버렸다.
둘째, 근대국가의 등장 이후부터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권력과 정치가 한 쌍이 되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국민국가라는 한 가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제 이들은 별거 상태로 이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각자 도생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넷째,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그리고 이처럼 파편화된 삶은 ‘종적인 사고방식(vertical orientation)’보다는 ‘횡적인 사고방식(lateral orientation)’을 조장한다. 사람들은 이제 각각의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다른 기회와 상이한 확률분포에 반응해야 하며, 그럴 때마다 다른 기술을 사용하고 자산을 새롭게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오늘날 개인은 ‘선택하는 자유인’이 되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선언되는 덕목은 규칙(여하튼 극히 드물고 종종 서로 모순적인)에 순응하는 태도(conformity)가 아니라, 그런 규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flexibility)이 되는 것이다.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유동적) 근대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전자의 사회에서 개인은 노동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노동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고체 사회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은 ‘노동’이었고, 설령 한 개인이 실직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노동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한, 그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국가 또는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이 전 지구적으로 이동하는 유동적 근대 시대에 접어들어 상황은 변했다. 이제 한 개인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노동력이 아니라 소비력이며, 소비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개인들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차라리 없어야 하는 존재, 즉 ‘쓰레기’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3.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으로의 귀환?
위기의 때에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실패한 낙원으로 귀환하는 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 나은가? 최근 출간된 유작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의 귀환』(아르테, 2018)에서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대안이 없다며 아늑한 과거에만 머문다면 같이 공동묘지에 들어가는 일만 남을 뿐이다.” 어쩌면 ‘심리상담’과 ‘떡볶이’로 마음을 달래는 역사상 가장 우울한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또한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로 숨어드는 한 많은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에게,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진리 탐구자들에게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레트로토피아는 과거(레트로)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이다. ‘국경 없는 자본’, ‘영토 없는 통치’를 통해 지구화와 개인화를 실천하고 있는 현실의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한 조건 아래 놓이게 된 이들이, 분노와 절망에 내몰린 이들이, 유토피아에 대한 ‘이차 부정’으로 ‘이미 실패한 과거’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삼은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사실 미래와 달리 과거의 기억은 친숙하다. 2016년 영국이 총선거로 유럽연합(EU)을 탈퇴하겠다고 결정할 때, ‘브렉시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N. Farage)는 이렇게 외쳤다. “내 나라를 돌려 달라(My Country Back).” 2016년 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캠프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두 나라의 핵심은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망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이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지구의 경찰국가 미국으로, 디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렇게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유는 그 속에 4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홉스로의 회귀’, ‘부족으로의 회귀’, ‘불평등으로의 회귀’, ‘자궁으로의 회귀’ 등이다. 먼저 ‘홉스로의 회귀’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주권국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실패한 것이었다.
둘째 ‘부족으로의 회귀’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모순이 끝내 ‘나’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배제하는 ‘부족주의’를 다시금 부추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 지금 들끓는 전쟁과 테러, 민족주의의 새로운 열풍은 이런 부족 회귀 현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셋째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복지국가’ 정책의 실패 이후, 좌파의 복지, 평등을 비판하고, 급격히 확대되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며, 우파의 경제정책(경제적 불평등을 옹호하는) 복귀를 내포한다.
마지막 ‘자궁으로의 회귀’는 자본주의가 구축한 문화와 생활세계 속에서 갈수록 개인의 문제에만 침잠하는 나르시시즘의 문제를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들의 원천에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트로토피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이다.
4. 기본소득과 초대교회 공동체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미래로 가는 대안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대화는 타인을 유효한 대화상대로 바라보고, 외국인, 이주자, 그리고 다양한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경청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존중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대화를 만남의 한 형태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공정하게 반응하는 포괄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합의와 동의를 구축하는 수단’을 창조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긴급히 동참시켜야 한다.”
그럼 대화만 하면 될까? 대화 이전에 대화가 가능할 전제 조건은 없을까? 바우만도 그것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유효한 대화 파트너’로 인식하고 대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적인 조건들이 부합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인정한 평등한 지위’의 보장, 곧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경제모델이다.” 쉽게 말하면 경제적 균등이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균등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우만은 ‘보편적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파국을 향하는 흐름을 뒤집으려는 투쟁에서 유례없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곧, ‘보편적 기본소득’에 담긴 철학은 과거 지구화·개인화의 흐름 속에서 끝내 실패해버린 ‘복지국가’의 기반을 뒤집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자, 이제 교회부터 시작해 보자. 교회의 모든 헌금을 ‘종교국(이름은 어떠하든 상관없다)’으로 모은다. 그리고 종교국은, 목회자의 사례는 가족 수에 비례해서 지급하고, 교회 운영비는 교회 규모에 맞추어 지급한다. 그 외 남는 모든 금액은 그 교회가 속한 마을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본 소득으로 쓴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할 것이다. 거짓말 말라고? 사도행전에 이미 시행되었고, 나와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 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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