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Technology of Achievement>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소위 <쪼개진 인생, 쪼개진 시간>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쪼개진 시간이란 하루라는 시간이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종류의 시간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근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일에 매달려 삽니다. 성취의 기쁨을 크게 느끼는 것도 이런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후 5시 이후 근무가 끝나면 딴 사람이 된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하던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립니다. 이럴 때 그의 하루는 쪼개진 시간이 됩니다.
하루라는 시간만 쪼개지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애 전체가 쪼개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쪼개지는 문제는 그 안에 일관성, 통일성의 부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관성과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쪼개지는 것입니다. 근무 시간에 일할 때와 동일한 일관된 태도로 근무 후의 시간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의 생애는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관성의 부재로 인해 쪼개지는 결과가 나타나는 몇 가지 경우를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 홀로 있을 때에 일관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할 때는 아주 점잖고 고상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빈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헨리 나웬은 <홀로 있을 때 그대 누구인가>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 일이 많을 때와 일이 없을 때에 일관성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일이 많을 때는 정말 인생을 알차게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일이 없을 때는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28장의 말씀처럼 <성읍에 있으나, 들에 있으나, 들어가나, 나가나> 복을 받는 것이 중요하듯이, 성읍이든 들판이든, 들어갈 때든 나올 때든 일관된 삶의 모습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함께 계실 때>,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셨습니다. 피곤하셔서 제자들과 휴식을 취하려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무리들이 거기까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무리들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고,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리와 작별하신 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본문 46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와 작별하셔서 혼자 계실 때,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할 일이 없어졌을 때, 우리처럼 빈둥거리신 게 아니라,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무리와 함께 할 때나 무리와 작별한 후에나 예수님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삶의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서 지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나 홀로 있을 때, 여전히 우리는 <나>로서의 존엄성을 잃으면 안됩니다. 둘째로 <사명>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사명의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기도>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의 기도를 올리셨고, 홀로 계실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비난받게 된 이면에는 표리부동한 모습, 이중 인격적 삶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믿을 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다시 존경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무리와 작별한 후>에 더욱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하루라는 시간만 쪼개지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애 전체가 쪼개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쪼개지는 문제는 그 안에 일관성, 통일성의 부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관성과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쪼개지는 것입니다. 근무 시간에 일할 때와 동일한 일관된 태도로 근무 후의 시간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의 생애는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관성의 부재로 인해 쪼개지는 결과가 나타나는 몇 가지 경우를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 홀로 있을 때에 일관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할 때는 아주 점잖고 고상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빈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헨리 나웬은 <홀로 있을 때 그대 누구인가>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 일이 많을 때와 일이 없을 때에 일관성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일이 많을 때는 정말 인생을 알차게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일이 없을 때는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28장의 말씀처럼 <성읍에 있으나, 들에 있으나, 들어가나, 나가나> 복을 받는 것이 중요하듯이, 성읍이든 들판이든, 들어갈 때든 나올 때든 일관된 삶의 모습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함께 계실 때>,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셨습니다. 피곤하셔서 제자들과 휴식을 취하려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무리들이 거기까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무리들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고,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리와 작별하신 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본문 46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와 작별하셔서 혼자 계실 때,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할 일이 없어졌을 때, 우리처럼 빈둥거리신 게 아니라,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무리와 함께 할 때나 무리와 작별한 후에나 예수님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삶의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서 지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나 홀로 있을 때, 여전히 우리는 <나>로서의 존엄성을 잃으면 안됩니다. 둘째로 <사명>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사명의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기도>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의 기도를 올리셨고, 홀로 계실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비난받게 된 이면에는 표리부동한 모습, 이중 인격적 삶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믿을 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다시 존경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무리와 작별한 후>에 더욱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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