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④
사진-신학(Photheology)의 도전: 아드 폰테스
1. 사진의 도전: 회화가 근본으로 돌아가다.
미학의 역사에서 칸트(I. kant)는 고전주의를 벗어나 근대를 연 사상가이다. 고전주의는 미란 ‘본질을 현시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일정한 규칙(본질, 혹은 진리)을 정해놓고 그것과 예술 작품이 1:1로 대응하면(혹은 잘 묘사하면) 아름다운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파르테논 신전과 같이 수치 비례적으로 완벽에 가까워야 하며, 예술은 진리와 도덕과 종교에 종속되어야한다. 나아가 모든 사물과 사건은 ‘진’리→-‘선’함→‘미’의 순서로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미스코리아의 순위처럼.
그러나 근대가 열리면서 예술은 본질로부터 탈피하여 물질을 통한 감성의 창출, 대상의 상실, 현실의 주체적 해석, 상상 공간의 창조, 의미의 배제 등으로 새롭게 변화된다. 그 시작에 칸트의 미학이 놓여 있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는 개인적인 느낌을 따르는 것이다. 미란 인식이 아니라, 쾌감이다. 따라서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 내용에 있지 않고, 예술의 형식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가는 스스로 규칙을 세워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천재’이지, 고전주의 예술가처럼 일정한 규칙을 따라 자연을 모방하는 ‘장인’이 아니다.
이제 ‘미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예술은 더 이상 윤리적인 가치를 가질 필요가 없다. 오로지 고유의 미적 자율성만 필요로 하게 되었다. ‘순수한 형식의 조합과 상상력의 놀이’로 예술이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사진술의 발명¹은 위기이기도 했지만, 회화가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가 형식의 자유로운 유희를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사진은 풍경화와 인물화, 정물화 등 회화가 재현 대상으로 삼았던 모든 것들을 더 잘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고전주의에 입각한 사람들에게 사진은 회화보다 더 수치 비례적으로 대상과 완벽에 가까운 것이기에 회화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회화는 선과 색, 곧 형태와 채색이라는 회화의 근본으로 돌아가며 위기를 극복한다.
차가운 추상의 몬드리안의 작품이나 뜨거운 추상의 칸딘스키의 작품. 그리고 추상표현주의 잭슨 폴록의 작품은 바로 회화가 그 자신의 근본인 ‘형’과 ‘색’으로 돌아갔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때 회화는 폭발적으로 부활하게 된다. 현대 미술이 탄생된 것이다.
2. 사진-신학의 도전: 신학이 근본으로 돌아가야!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분이며 신약성서에서 신은 직접 사람이 되어 힘없고 억압당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교회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가난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살리기 보다는 교회 자체의 존재를 우선시 하고 있다. 돈이 없어서 사라진 종교는 없으며 돈이 많아서 망하지 않은 종교도 없다. 번영신학을 통해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한국교회의 분위기 속에, ‘목회’가 아니라, 교회라는 단체를 ‘경영’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저 찬란한 정교분리를 통한 내세축복을 바라는 기복신앙과 현실적 맘몬에 가치를 둔 실용주의가 그 근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회화가 사진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의 위기의 때에 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것처럼 신학도 교회도 위기의 때에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류대영 교수의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2009)를 보면 한국 개신교의 정치성을 역사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 땅에 첫 개종자를 배출한 이래 개신교는 줄곧 문명과 야만, 중화와 서방,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돌하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일선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개화기의 개신교는 ‘진보의 전도사’였다. 한글 보급과 출판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축첩, 조혼, 신분제 같은 전근대적 구습과 대결하는가 하면, 인권을 신장하고 민족의식을 불어넣어 지식인과 민중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계기로 한국 개신교는 뚜렷한 탈정치화 경향을 띠면서 내세지향적인 감성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후 1920년대 유입된 ‘사회주의와의 충돌’은 뿌리 깊은 반공주의의 기원이 되었고, ‘반공의 신학화’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월남한 교계 지도자들에 의해 더욱 견고해졌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된 ‘보수 개신교의 정치적 세력화’는 마니교적 선악이원론과 종말론적 위기의식, 80년 광주를 지나면서 시작된 친미주의 세계관의 균열에 대한 불안 등이 정치적 보수주의와 유착되어 일부 교회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추동했다는 것이다.
다시금 전근대적인 구습이 한국사회를 드리운 이때 ‘한국 교회사의 아드 폰테스(ad fontes, 근본으로 돌아가라)’인 개화기의 개신교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 되풀이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각주1>
사진은 공식적으로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인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 J. M. Daguerre, 1789~1851)에 의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최초의 사진은 그보다 10여년이 앞선 1820년대 중반 역시 프랑스 사람 조셉 니세프르 니엡스(J. N. Niepce, 1765~1833)에 의해 만들어졌다. 물론 사진영상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자각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500년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부터 시작되었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부산대학교 문학박사, 부산대 윤리교육과 강사
ⓒ 한국기독신문 & www.kcnp.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