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가나안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드시 가나안을 얻어야 한다는 설교를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상당 부분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목적이 가나안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을 만났을 때 단 한 번도 가나안을 얻기 위해 애굽을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더구나 모세는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 쯤 들어가서> 여호와를 섬기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5장 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도 아닌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곳이 가나안이든 광야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라도 하나님만 섬길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가나안만 강조하는 데서 오는 잘못은 가나안을 얻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반드시 가나안을 얻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만약 가나안을 얻지 못한 인생이 실패한 것이라면 모세는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그는 가나안에서 단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 므리바 물가의 사건으로 인해 가나안에 발을 디뎌 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의 삶을 결코 실패의 삶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34장이나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은 모세를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가나안만 강조하다보니 가나안을 얻기 전까지의 삶을 비참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광야 사십 년은 비참한 삶이었나요? 아닙니다. 기적의 떡인 만나를 먹으면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던 은혜의 나날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광야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행함으로써 충실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가나안만 강조하다가 여러 문제를 만났습니다. 가나안을 얻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과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을 얻기 전에 지나가는 광야 생활을 비참한 삶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을 욕구 불만 환자로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을 얻은 사람은 교만하여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광야에서가 아니라 가나안에서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나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 망합니다. 우리는 오늘 광야를 걷고 있더라도 거기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광야를 걷다 보면 어느새 가나안에 도착한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광야 길을 감사함으로 걷길 기원합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목적이 가나안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을 만났을 때 단 한 번도 가나안을 얻기 위해 애굽을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더구나 모세는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 쯤 들어가서> 여호와를 섬기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5장 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도 아닌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곳이 가나안이든 광야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라도 하나님만 섬길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가나안만 강조하는 데서 오는 잘못은 가나안을 얻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반드시 가나안을 얻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만약 가나안을 얻지 못한 인생이 실패한 것이라면 모세는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그는 가나안에서 단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 므리바 물가의 사건으로 인해 가나안에 발을 디뎌 보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의 삶을 결코 실패의 삶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34장이나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은 모세를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 가나안만 강조하다보니 가나안을 얻기 전까지의 삶을 비참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광야 사십 년은 비참한 삶이었나요? 아닙니다. 기적의 떡인 만나를 먹으면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던 은혜의 나날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광야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행함으로써 충실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가나안만 강조하다가 여러 문제를 만났습니다. 가나안을 얻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과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을 얻기 전에 지나가는 광야 생활을 비참한 삶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을 욕구 불만 환자로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을 얻은 사람은 교만하여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광야에서가 아니라 가나안에서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나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 망합니다. 우리는 오늘 광야를 걷고 있더라도 거기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광야를 걷다 보면 어느새 가나안에 도착한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광야 길을 감사함으로 걷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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