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후 그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삶의 자리를 불편하고 좌절케 한 것이 유언비어였다. 천안함 사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광우병 소고기 파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유언비어로 국민생활이 불안하고 불편스러웠다. 지나고 나면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결과에 허탈감에 고소(苦笑)를 금치 못한다.
메르스 질병이 확산되면서 가장 화가 나고 불편스러운 것이 역시 유언비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는 내용이 연일 뉴스에 보도가 되고 경찰에서는 철저하게 유언비어 단속을 한다고 으름장을 놓지만, 국민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유언비어는 메르스 질병보다 그 확산 속도가 더 빠르고 멈추지 않는다.
유언비어는 근거가 부족한 상태로 소문에 의하여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람들 사이에 연쇄 반응적으로 퍼지는, 말 그대로 유언(流言)이고 비어(蜚語)다. 그 전달경로가 일정하지 않고 내용도 당면의 상황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지만 보통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유언비어다. 허위제보와 유언비어는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지만 허위제보는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으로 유언비어와는 구별이 된다.
G. W. 알포트와 L. 포스트만은 유언비어 전달의 강도는 그 내용의 중요성과 모호한 상황의 곱에 비례한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질병 확산 같은 정치적 혼란과 재해적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불만이 팽배할 때, 유언비어의 영향을 받기 쉽다. 그리고 그것은 불평과 불만을 어떤 대상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파괴적 의도로 만들어진다. 특히 괴담이나 악담 같은 경우는 빠르게 전파되어 그것이 하나의 설(說)이 되면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혼란에 처하게 된다.
명심보감에 ‘經目之事 恐未皆眞 背後之言 豈足深信’(경목지사 공미개진 배후지언 기족심신)이란 말이 있다. ‘눈으로 직접 본 일도 참된 일일까 하고 두려워하는데, 등 뒤에서 하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하다. 그럴듯한 유언비어에 마음을 도적질 당하면서도 자신의 인격과 삶이 손상당하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유언비어는 언어폭력이 되고 인격말살의 죄악이다. 그런 말을 날조하고 조작하여 퍼뜨리는 것을 쾌감으로 느끼는 마음은 이미 지옥이다. 양심이 화인 맞고 인격이 부서진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인격과 도덕적 가치가 확립된 사람은 그와 같이 확인도 안 된 것을 사실인양 퍼뜨리는 말을 믿고 함께 춤을 추지 않는다.
한 때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식품을 수입한다는 등의 괴담이 인터넷과 SNS 등으로 급속히 확산돼 국민 불안이 커지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때도 있었다. 소고기 파동을 겪었고, 천안함 사건을 겪었고, 세월호 사고를 겪었고, 지금은 메르스 질병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민정서가 카오스현상이다. 이 상황에 메르스 질병과 관련된 유언비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다.
유언비어가 확산되는 곳은 언제나 진실이 어둠속에서 신음을 한다. 그 사이에 유언비어는 거리를 활보한다. ‘카더라’와 ‘찌라시’에 마음을 도적질 당하면서 스스로 유언비어에 동화(同化) 되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벌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나고 나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이 없지만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현실에 동류(同流)되어 간다.
한(漢)나라 때 성품이 곧고 너그러운 직불의(直不疑)란 사람이 있었다. 직불의가 시종으로 문제(기원전 180~157)를 섬길 때의 일이다. 함께 살고 있는 동료 한 사람이 휴가로 고향에 갈 때 잘못해서 동료의 금을 가지고 가버렸다. 주인은 자기의 금이 없어진 것을 알고 직불의가 훔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다. 그 사실을 안 직불의는 훔친 것은 틀림없이 자기라고 말하고는 사죄하며 금을 사서 반환해 놓았다. 그런 얼마 뒤에 동료가 고향에서 돌아와 잘못 가져간 금을 반환시켰다. 직불의를 의심했던 주인은 자기의 경솔함을 부끄러워했다. 그 뒤부터 직불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평판이 돌았다. 그 일 때문에 문제의 눈에 들어 태중대부(궁궐의 고문)까지 승진하게 됐다.
그 무렵의 일이다. 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사람이 그를 모함했다. “직불의는 공무 처리가 뛰어나고 모습이 준수하지만 흠이 있습니다. 그가 그의 형수와 간통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시지요?”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직불의를 아끼는 한 사람이 직불의를 찾아가 시중에 나도는 소문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직불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개의치 않았다. 직불의를 모함하고 폄훼하는 유언비어는 세상에 창궐한데 직불의는 여전히 자기소임을 성실히 감당해 나갔다. 나중에야 그 소문이 유언비어였음이 드러났다. 직불의에게는 형(兄)이 없었던 것이다.
금(金)이 변하지 않듯 진실은 영원하고, 진실은 변명하지 않으며, 진실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 이치이다. 다만, 그렇게 진실이 드러나기까지는 온갖 아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겪어야 하지만, 결국 역사는 속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르스 질병이 확산되면서 가장 화가 나고 불편스러운 것이 역시 유언비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는 내용이 연일 뉴스에 보도가 되고 경찰에서는 철저하게 유언비어 단속을 한다고 으름장을 놓지만, 국민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유언비어는 메르스 질병보다 그 확산 속도가 더 빠르고 멈추지 않는다.
유언비어는 근거가 부족한 상태로 소문에 의하여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람들 사이에 연쇄 반응적으로 퍼지는, 말 그대로 유언(流言)이고 비어(蜚語)다. 그 전달경로가 일정하지 않고 내용도 당면의 상황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지만 보통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 유언비어다. 허위제보와 유언비어는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지만 허위제보는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으로 유언비어와는 구별이 된다.
G. W. 알포트와 L. 포스트만은 유언비어 전달의 강도는 그 내용의 중요성과 모호한 상황의 곱에 비례한다고 했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질병 확산 같은 정치적 혼란과 재해적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고 불만이 팽배할 때, 유언비어의 영향을 받기 쉽다. 그리고 그것은 불평과 불만을 어떤 대상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파괴적 의도로 만들어진다. 특히 괴담이나 악담 같은 경우는 빠르게 전파되어 그것이 하나의 설(說)이 되면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면서 혼란에 처하게 된다.
명심보감에 ‘經目之事 恐未皆眞 背後之言 豈足深信’(경목지사 공미개진 배후지언 기족심신)이란 말이 있다. ‘눈으로 직접 본 일도 참된 일일까 하고 두려워하는데, 등 뒤에서 하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하다. 그럴듯한 유언비어에 마음을 도적질 당하면서도 자신의 인격과 삶이 손상당하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유언비어는 언어폭력이 되고 인격말살의 죄악이다. 그런 말을 날조하고 조작하여 퍼뜨리는 것을 쾌감으로 느끼는 마음은 이미 지옥이다. 양심이 화인 맞고 인격이 부서진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인격과 도덕적 가치가 확립된 사람은 그와 같이 확인도 안 된 것을 사실인양 퍼뜨리는 말을 믿고 함께 춤을 추지 않는다.
한 때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식품을 수입한다는 등의 괴담이 인터넷과 SNS 등으로 급속히 확산돼 국민 불안이 커지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때도 있었다. 소고기 파동을 겪었고, 천안함 사건을 겪었고, 세월호 사고를 겪었고, 지금은 메르스 질병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민정서가 카오스현상이다. 이 상황에 메르스 질병과 관련된 유언비어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다.
유언비어가 확산되는 곳은 언제나 진실이 어둠속에서 신음을 한다. 그 사이에 유언비어는 거리를 활보한다. ‘카더라’와 ‘찌라시’에 마음을 도적질 당하면서 스스로 유언비어에 동화(同化) 되어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벌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나고 나면 그보다 더 허망한 일이 없지만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현실에 동류(同流)되어 간다.
한(漢)나라 때 성품이 곧고 너그러운 직불의(直不疑)란 사람이 있었다. 직불의가 시종으로 문제(기원전 180~157)를 섬길 때의 일이다. 함께 살고 있는 동료 한 사람이 휴가로 고향에 갈 때 잘못해서 동료의 금을 가지고 가버렸다. 주인은 자기의 금이 없어진 것을 알고 직불의가 훔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다. 그 사실을 안 직불의는 훔친 것은 틀림없이 자기라고 말하고는 사죄하며 금을 사서 반환해 놓았다. 그런 얼마 뒤에 동료가 고향에서 돌아와 잘못 가져간 금을 반환시켰다. 직불의를 의심했던 주인은 자기의 경솔함을 부끄러워했다. 그 뒤부터 직불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평판이 돌았다. 그 일 때문에 문제의 눈에 들어 태중대부(궁궐의 고문)까지 승진하게 됐다.
그 무렵의 일이다. 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사람이 그를 모함했다. “직불의는 공무 처리가 뛰어나고 모습이 준수하지만 흠이 있습니다. 그가 그의 형수와 간통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시지요?”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직불의를 아끼는 한 사람이 직불의를 찾아가 시중에 나도는 소문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직불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개의치 않았다. 직불의를 모함하고 폄훼하는 유언비어는 세상에 창궐한데 직불의는 여전히 자기소임을 성실히 감당해 나갔다. 나중에야 그 소문이 유언비어였음이 드러났다. 직불의에게는 형(兄)이 없었던 것이다.
금(金)이 변하지 않듯 진실은 영원하고, 진실은 변명하지 않으며, 진실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 이치이다. 다만, 그렇게 진실이 드러나기까지는 온갖 아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겪어야 하지만, 결국 역사는 속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한국기독신문 & www.kcnp.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