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외부 환경은 모두 내 속 사람의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겪을 때는 두려움 속에서 환경을 탓하거나 원망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나와서 수르광야에서 사흘 길을 걷게 된다. 즉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걸으면서 물을 찾지 못하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마라’라는 지역에 이르러 샘물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나오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두려움과 원망과 탓일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당연히 나와야 하는 것은 원망하고 탓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 때문에 이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땅에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메르스라는 바이러스 앞에서 어떤 사람은 손을 자주 씻고, 어떤 사람은 비타민 C를 먹고, 어떤 사람은 메르스를 해결하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수고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많이 두려워하고 있다. 사실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은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나 메르스에 전염되면 원망하고 탓하고 욕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메르스로 인해 고통당하고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더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이러스를 해결하기 위해 원인을 찾아올라가 보면 그 근원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지배욕과 소유욕과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순서에 따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가장 위에 사랑과 선, 그 다음에 소유욕, 가장 밑에 자기지배욕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서 돈과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가장 위에 지배욕이 있고, 그 가운데 소유욕이 있고 맨 밑에 사랑과 선에 대한 원함이 있는 사람은 지배력을 갖고 사랑과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발로 밟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나 누구든지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려는 중심이 있을 때 함께 살 수 있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심에 자신의 의도가 있거나 의도는 좋다하더라도 거짓과 악을 행하면 결국에는 상대방을 이용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짓밟는 것이 되어버려서 삶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12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오랫동안 교회의 사택에서 생활하다가 날개영성하우스를 지으면서 아이들의 학교 가까운 곳에 처음으로 전셋집을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 그 집이 은행에 근저당이 되어있는 일명 깡통 집이었다. 집 주인의 의도적인 사기에 전세금의 절반을 날리고 몇 달 후 집을 비워주어야 했다. 우리 가족 다섯 명은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자연스럽게 나오겠는가? 집 주인에 대한 원망이나 스스로의 무지함에 대한 한탄이 당연한가? 나는 가진 돈이 없어서 절망스럽고 무서웠지만 집을 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으로 두었다. 그리고 집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내 속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우선 돈이 되는 것은 다 구했다. 부모님과 아는 사람에게 빌리고 적금을 해약하고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고 이번에 전세가 아닌 집을 사게 되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빚을 다 갚고 편안히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사람의 진짜 모습은 마지막 때 나타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때,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가슴 철렁한 문제가 생겼을 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부사이에도 돈이 없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고 이혼을 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돈이 없기 때문에 더 행복하고 사랑하는 부부도 있는 것이다. 오늘 당신은 많은 사건을 만날텐데 무엇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화내고 원망하는 것이 당연한가? 아니면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가?
지금 한국 땅에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메르스라는 바이러스 앞에서 어떤 사람은 손을 자주 씻고, 어떤 사람은 비타민 C를 먹고, 어떤 사람은 메르스를 해결하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수고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많이 두려워하고 있다. 사실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은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나 메르스에 전염되면 원망하고 탓하고 욕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메르스로 인해 고통당하고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더 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이러스를 해결하기 위해 원인을 찾아올라가 보면 그 근원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지배욕과 소유욕과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순서에 따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가장 위에 사랑과 선, 그 다음에 소유욕, 가장 밑에 자기지배욕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서 돈과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가장 위에 지배욕이 있고, 그 가운데 소유욕이 있고 맨 밑에 사랑과 선에 대한 원함이 있는 사람은 지배력을 갖고 사랑과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발로 밟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동료나 누구든지 상대방을 사랑하고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려는 중심이 있을 때 함께 살 수 있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심에 자신의 의도가 있거나 의도는 좋다하더라도 거짓과 악을 행하면 결국에는 상대방을 이용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짓밟는 것이 되어버려서 삶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12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오랫동안 교회의 사택에서 생활하다가 날개영성하우스를 지으면서 아이들의 학교 가까운 곳에 처음으로 전셋집을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 그 집이 은행에 근저당이 되어있는 일명 깡통 집이었다. 집 주인의 의도적인 사기에 전세금의 절반을 날리고 몇 달 후 집을 비워주어야 했다. 우리 가족 다섯 명은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자연스럽게 나오겠는가? 집 주인에 대한 원망이나 스스로의 무지함에 대한 한탄이 당연한가? 나는 가진 돈이 없어서 절망스럽고 무서웠지만 집을 구하는 것이 가장 우선으로 두었다. 그리고 집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내 속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우선 돈이 되는 것은 다 구했다. 부모님과 아는 사람에게 빌리고 적금을 해약하고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고 이번에 전세가 아닌 집을 사게 되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빚을 다 갚고 편안히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사람의 진짜 모습은 마지막 때 나타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때,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가슴 철렁한 문제가 생겼을 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부사이에도 돈이 없기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고 이혼을 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돈이 없기 때문에 더 행복하고 사랑하는 부부도 있는 것이다. 오늘 당신은 많은 사건을 만날텐데 무엇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화내고 원망하는 것이 당연한가? 아니면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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