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마지막 주 첫 월요일, 봄은 왔지만 아직 공기가 찬 이른 아침 4시 10분.
평소 같으면 아이들이 한창 꿈나라에 있을 시간이지만 그 날은 엄마인 나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아이들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깨우고 있다.
“은성아, 일어나야 해. 오늘부터 고난주간 특새 기간이야. 일어나기로 했지”
첫째가 부스스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눈이 떠지지 않아 몸은 따뜻한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만,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은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첫째는 꾸역꾸역 아침을 깨운다.
둘째는 어젯밤부터 요란하게 새벽을 기대하고 있었다. 워낙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라 새벽기도에 가면 친구들이 많이 올 것이라 기대해 전날부터 알람을 맞춰놓고 옷도 미리 다 입고 자는 등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물론, 일어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알람이 울리자, “엄마, 오늘 고난주간 맞지? 지금 바로 일어날게” 라며 대견스럽게 스스로 준비하며 눈을 감은 채 거실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셋째와 넷째이다. 아직 어린 두 아이는 몇 번을 흔들어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참을 깨워도 반응이 없자 급기야는 “새벽기도 갔다 오면 젤리 사줄게. 아이스크림도.”라며 겨우겨우 달래서 차에 태웠다.
아직도 어둑어둑한 새벽 4시 40분.
아이들은 잠이 덜깬 채 몽롱한 상태로 무작정 아빠 엄마를 따라 교회로 나선다.
비록 이 아이들이 평소와 달리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간다고 해서 갑자기 성령의 은혜가 부어져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고난주간의 의미를 엄청 깊이 생각해 스스로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닌데 남편과 나는 왜 힘들게 아이들을 깨워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게 할까?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아이들에게 남기고픈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미지’고 ‘추억’이다.
물론,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이맘때를 기억할 때,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봄날에 고난주간을 맞아 엄마 아빠와 함께 간 특별새벽기도회 때 들었던 목사님의 말씀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어요!”라고 생각해주면 가장 보람되고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신앙생활을 통해 여러 경험들을 해 보니 그런 일은 극히 드물고, 어릴 때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이미지’와 ‘추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아침에 눈뜨기가 버겁고,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만번의 다짐과 각오가 있어야 하지만 그 힘듦을 꺾고 나가는 것이다.
어린 시절, 고난주간에 아빠와 엄마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온 가족이 교회에 갔다는 이미지와 스토리를 남겨주기 위해서이다.(물론, 고난주간과 부활절의 의미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함도 있다.)
매해 고난주간에 새벽기도를 간 경험이 쌓이면 먼 훗날 아이들이 자랐을 때, 고난주간만 되면 아주 자연스럽게 이 장면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함께.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를 완주하기까지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목요일 새벽에는 우리 부부도 일어나기가 버거웠으며, 아이들은 첫날의 호기로움은 사라지고 ‘자고 싶다’며 1분이라도 더 이불 속에 있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지막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며 남편과 나는 아이들에게 완주했다는 기쁨과 성취를 주기 위해 햄버거를 아침으로 사주었다.
아이들은 좀처럼 아침에는 먹을 수 없는 햄버거를 손에 쥐며 일주일의 힘듦과 괴로움은 다 잊은 채 “엄마, 너무 좋아. 언제 또 새벽기도 가는 거야? 나 또 갈래”라며 내년을 기약한다.
그래, 어렵게 생각할 게 있을까? 아이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며 하나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 지금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임을 또 한번 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