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개인들은 이성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이들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세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당연히 이 세상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이 세상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려고 노력했고, 예루살렘의 부유한 지역에 주로 거주했습니다.
어느날 이들이 예수님께 이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후사가 없이 죽은 후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또 후사가 없이 죽었고, 계속 동생들이 형수와 결혼했고, 결국 일곱 형제와 여인까지 모두 죽었는데, 부활이 있다면 나중에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현실성이 전혀 없는, 단지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 마음으로 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시면서 마태복음 22장 3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본래 미디안 광야의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라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대략 7백여 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수백 년 전에 죽은 조상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계신 현재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죽은 아브라함이 아닌, 살아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수백 년 전에 죽어서 사라진 아브라함이 아니라, 살아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이 바로 이 뜻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아브라함은 죽은 후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재형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세 번을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이니라, I am the Lord.>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존재하셨던 분이 아니라,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을 <사건의 모음>으로 이해하지 말고, <존재와 관계>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건으로 모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일으켜 주신 특별한 일들을 모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이는 자신이 경험한 기적 같은 몇 가지 일을 나열합니다. 간증집회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일들은 <과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지나간 과거입니다. 출애굽, 홍해를 건넌 일, 아말렉을 이긴 것 등은 다 과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존재하고,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그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폐지하신 것도 그것이 과거의 출애굽을 기억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몸과 피로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임하여 계신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 가장 큰 축복은 과거에 경험한 특별한 기적적 사건들이 아닙니다. 가장 큰 복은 <현재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으로 계시다>는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함께하시고, 모든 상황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이 복을 누리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