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옮겨온 이야기다. 전직 대통령 중에 발음이 온전치 않은 분이 한 분 계셨다. 그 분에 관한 에피소드도 많이 알려졌다. 한번은 어느 도시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나는 이 도시를 유명한 강간(관광)도시로 만들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을 수행했던 외무장관이 깜짝 놀라 용어를 수정하여 말씀 드렸다. “각하, 강간 도시가 아니라 관광 도시입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자존심 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애무(외무)장관은 씰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애무(외무)나 잘 하세요.” 리더는 말과 행동이 명확해야 하는 것을 일깨우는 우스갯소리다.
집사님 한 분이 질문을 하였다. “목사님의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통감의 리더십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입니까?” “역사를 거울로 보는 혜안과,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안과, 작은 자를 주님처럼 보는 심안의 리더십입니다.” “어디에서 그 리더십을 정립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리더십에 근거한 것이죠.” “예수님의 복음적 리더십이 무엇입니까?” “이해, 관용, 용서, 사랑을 통한 섬김의 리더십이지요.” “그러면 이기적이고 독단적이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적 리더십으로 다스려야죠.” “그러면 무조건 용서하고 감싸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잘못할 때는 권징의 징계 수단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럼 그 기준, 즉 사랑하고 징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무슨 말이죠?” “분명히 우리가 보아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무질서하게 하고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문제 있는 사람인데 왜 목사님은 감싸고돌고,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이 없는데요?” “우리 교인 모두에게 다 물어보십시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다 똑 같이 대답할 겁니다. 목사님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조금은 충격적인 이야기라 오랫동안 이 문제로 마음이 무거웠다. 강단에서는 서릿발 같은 말씀을 선포하면서 강단을 내려오면 그 서릿발은 봄눈 녹듯이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토록 베풀고 사랑했는데 배반으로 돌이킨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동행하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지도자의 언행(言行)!’ 참 어려운 말이다. 인간이란 어떤 사람을 무론하고 완벽한 도덕과 윤리적 삶을 사는 이가 없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으리라. 그러기에 도덕적, 윤리적 삶을 뛰어넘어 성경적 관점에서 어프로치 해야만 제대로 답을 얻을 수 있다. 성전에서 돈 바꾸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불호령으로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외치시며 그들을 몰아내시던 주님은 간음죄로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향하여 돌로 치라고 소리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는 ‘죄 없는 사람이 있다면 치라’고 하시면서 여인을 살려내셨다. 그 주님의 언행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규범윤리, 상황윤리를 넘어선 ‘생명윤리’다.
웃기는 언행일치(言行一致) 사건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2004년 11월 18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웃지 못 할 기사가 실렸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는 책을 출판 한 저자 차 모씨가 구속 수감 된 이야기다. 차 씨는 경영컨설팅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남의 돈 18억을 빌려 쓰고 중국으로 도망을 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암으로 입원을 하게 되자 별 수 없이 귀국을 했다가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이 되었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는 책을 쓰고 자기가 그 말대로 행한 웃기는 언행일치의 사건이다. 이런 상황을 보며 “진짜 언행일치의 사람”이라고 당시 네티즌들이 댓글을 달았던 일화는 유명한 에피소드다.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희망찬 취임사를 연설했다. 그러나 현 상황은 취임사와는 정반대로 허전하고 허망하게 귀결되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 지도자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때의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교회 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을 느낀다.
나의 약혼식과 결혼식은 고 김기수 목사님을 주례로 모셨다. 나 같이 별 볼 일없는 사람을 존귀하신 어른께서 주례해 주신 것이 감사하여 엎드려 큰절을 하면서 해마다 문안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때부터 어르신이 천국 가시기 전까지 우리부부는 한해도 빠지지 않고 33년 동안 결혼기념일이면 어르신을 찾아뵙고 축복기도 받는 것으로 결혼기념일을 대신했다. 목사로 안수 받던 날 눈물 콧물 쏟으며 서원했던 사례비의 3분의1은 헌금으로, 3분의1은 구제비로, 3분의 일은 생활비로 쓰겠다는 주님 앞에 드린 고백도 힘들 때가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 명예도, 온갖 자리매김의 영광도 내려놓고 조기 은퇴 후 때론 고달프기도 하지만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 부흥사경회 말씀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과 감동은 고달픔도 다 잊게 하는 경험하는 자 만의 축복이다.
아름다움이란 억지로 다듬어 내면 식상하기 쉬운 법,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나 연기나 노래나 설교나 목회에서도 다를 바가 없음을 늘 느낀다. 평생 목회를 하면서 그것을 늘 마음에 담고 목회를 했고 은퇴 후 전국 각지로 말씀 사역을 다니면서는 그곳 성도들의 삶에서 그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무게가 아니다. 분량이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순수함, 신선함, 건강함이 내재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근원에서 저절로 표출되는 하나님 마음이다. 삶이란 가꿈이다. 가꿈이란 낮아짐, 섬김, 베풂에서 자란다. 가장 힘든 언행의 가꿈도 할례 받은 입과 절제된 행동으로 요셉과 다윗 같은 Attitude, 즉 마음관리를 잘하면 더 없는 아름다운 자기 인생의 화원을 만들 수 있다. 언행의 가꿈은 일치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섬뜩해진다. 그러나 빛의 자녀로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서 연주되는 언행을 일치로 가꾸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내 마음은 아름다운 화원이 된다. 그러므로 더더구나 지도자의 언행일치는 지고한 생명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