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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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열 선교사는 미국의 교회와 개인으로부터 구호품을 인계 받아 구호활동을 계속했는데, 그가 남긴 보고서는 전쟁 당시 한국과 부산의 상항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주고 있다. 1951년 2월 15일자로 작성한 보고에서는 전쟁이 발발한지 7개월이 지난 때의 피해상황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한에서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된 목사수: 장로교 136명, 감리교 24명, 북한에서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된 목사 수 장로교 111명, 감리교 31명, 그리고 남북한을 합쳐서 성결교 목사 6인, 구세군 사관 4명, 성공회 신부 6명, 로마가톨릭 80명, 외국인 선교사 32명, YM, YW총무 7명, Y직원 1명이 피살되거나 행불자가 되었다고 했다. 다 합치면 438명이나 피살되거나 행방불면된 것이다. 또 남한의 피해자는 47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닐 수 있으나 그것이 선교사 사회에 알려진 통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에는 1만2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제주도로 피난을 갔고, 이중 목사는 400여명으로 목회자 가족은 1천7백 명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제주도로 간 피난민들이 제주도에 40여 교회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1953년 8월에 기록한 보고서에서는, 3년간의 전쟁에서의 교회의 피해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데, 500여 명의 목사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고, 파괴된 교회 수는 1천여 교회, 과부가 된 이가 10만 명, 전쟁고아가 20만 명, 파괴된 가옥 50만호, 시민 사상자 수는 1백만 명, 전쟁 피난민은 900만 명에 이르고, 북한땅에서 공산정권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보고하고 있다.
  권세열은 부산에 거주하면서도 서울을 왕래하기도 했는데. 1951년 6월 11일 주일에는 부산영락교회에서 설교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교회(영락교회를 의미함, 필자 첨가)는 서울에서 회집되던 잘 알려진 피난민교회였고, 지금은 피난민 생활을 부산에서 다시 시작하는 피난민교회로서, 서울의 담임목사를 계속 모시고 주일학교와 청년부 등도 본래대로 운영하면서 모이는 교회이다. 주일 아침예배에는 500여 명에서 1천여 명에 이르는 이들이 참석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서울교회들도 피난지 부산에서 재조직하여 전시 중심지의 바쁜 여건 중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전시중의 신학교육에 대한 보고도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권세열은 1951년 6월 16일자 보고에서, 서울 남산에 있던 장로교신학교는 1951년 5월 1일 부산진교회에서 피난 학교로 개교했는데, 100여명 등록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 등록학생이 275명에 달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스스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고 한다. 1951년 11월 7일자 보고에서는 대구에서 시작된 총회신학교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500여 학생들로 개교하였고, 학생들의 절반 이상은 그들의 부모나 형제들이 순교당 했거나 이산가족들이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이라고 한다. 교회 건물을 임시교사이자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고, 학과 공부 외에도 노방전도, 개인전도, 교회심방, 군인병원과 교도소 심방 등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53년 5월 15일자 보고에서는 졸업생이 73명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제 2회 졸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 졸업생인 김광수와 이능백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김광수(金光洙)와 그의 동생은 평양에서 그의 부친이 공산당의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금광에 끌려가 하루 20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유엔군이 북진할 때 총살자으로 끌려가던 광수의 아버지는 탈출하여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또 이능백(李能伯) 은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공산정권의 징집을 피해 마루 밑에 구멍을 파고 숨어 지내거나 산에서 피해 지내던 중 유엔군의 북진으로 해방되었고, 곧 한국인에 입대하여 공산 정권과 싸웠고 재대 후 신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1953년 5월 22일자 보고에 의하면,  1953년에 이 총회신학교에 20여명의 학생이 지원하여 총 등록학생이 45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신학교가 되었고, 학생 중 4분지 3은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한 이들이라고 한다. 신학교는 신학고목 외에도 기독교와 민주주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등의 과목도 공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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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4, 권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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