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불편한 아이를 둔 어머니가 계셨다. 가끔씩 학교에 오실 때면 교목실에 조심히 오셔서 “목사님 커피 한 잔 주실 수 있으세요?”하면서 나를 잠시 만나고 가고 하셨다.
하루는 학생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목사님, 제 소원 아니 우리 부부의 소원이 뭔지 아세요?”
“우리 애보다 하루 늦게 죽는겁니다. 불편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애를 지지해주고 끝까지 지탱해줄 사람은 우리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보다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이 말을 듣는데 가슴이 얼마나 먹먹했는지 모른다.
신약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등장한다. 귀신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그 지역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머니는 예수님을 무작정 찾아왔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탁을 한다. “우리 딸이 귀신을 들렸는데 불쌍히 여기고 고쳐 주십시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내 백성(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지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가나안 여인의 입장에서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날 상황이었다.
만약 나였다면, 분명히 따졌을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서 일한다고 말은 하면서 사람을 가려서 하냐?”고 분명히 따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차 부탁을 한다.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부탁을 한다.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다시 부탁을 한다.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이 여인의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귀신 들린 딸을 고쳐 주셨다.
나는 이 사건을 뒤집어서 생각해봤다. 귀신 들린 딸이 힘들었을까? 어머니가 힘들었을까?
분명히 힘든 당사자는 어머니다. 위의 제자 이야기처럼 이 땅의 부모님들은 내가 아픈 것, 내 자존심 상하는 것, 그렇게 개의치 않는다. 내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모든 것 다 내려 놓고 자녀들을 위해 희생한다. 가나안 여인 역시 정작 힘든 것은 자기 자신이었지만, 어머니가 힘들지만 힘들다고 하지 않고, 우리 딸 아이가 불쌍한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만약 귀신들린 사람이 내 딸이 아니라 남이었으면 분명히 어머니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린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내 딸이니 내가 힘든 것이 아니라 딸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 교회 교육현장을 돌아보았으면 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아이들이 남인가? 딸인가?
과거 우리나라 주일학교 부흥이 일어났던 시기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우리를 가르치실 때 남이 아니라 딸같이, 아들같이 여기며 우리를 신앙적으로 이끌어 주셨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수준도 높고, 교회의 여건도 잘 정비되어 있지만 과거의 신앙의 야성은 다 사라진 듯 하다.
여름을 지나가면서 올해도 예전과는 다르지만 수련회라는 이름으로, 부흥회라는 이름으로 여름 사역들을 진행했을 것이다. 이 사역 가운데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은 남이었는가? 딸이었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본질의 회복이다. 프로그램, 교육여건이 아닌 본질의 회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는 여름 사역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