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권주자 한 사람의 ‘120시간’ 발언으로 논쟁 아닌 논쟁이 격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일종의 비진의표시(非眞意表示)에 해당한다고 봅니다(민법 107조). 요즘 세상에 어떻게 그런 노동이 가능하겠습니까? 당사자의 의도도 그렇진 않았을 것이고, 듣는 이 대부분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았을 터,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주52시간제 시행에 예외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사람들은 앞부분만 집중하고 그 뒷말 즉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일하는 자체를 중시하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쉼과 안식을 노동 못지않게 중시하기 시작합니다.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은 이미 이와 관련된 규정을 두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노동 시간의 합리적인 제한과 장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24조). 우리 헌법은 아직은 이러한 “휴식권”과 “여가권”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최근 근로기준법이 동일한 방향성을 가지고 개정되었습니다. 먼저 ‘선택적 보상휴가’ 제도를 두어서 사용자와 근로자가 연장, 야간, 휴일 근무에 대해 보상 대신 휴가를 택할 수 있도록 했고(동법 55조의 2), 또한 ‘휴가 촉진’ 규정을 만들어서 근로자 역시 적극적으로 이러한 휴가를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59조의 2).
그간 우리는 정신없이 달려오기만 했습니다. 성장과 발전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잠시 멈추고 쉴 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안식을 명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만 할 때, 때로는 신적인 강제 조치가 뒤따르기도 합니다. 바벨론유수 사건이 그러했고, 지금의 감염병 사태도 ‘하나님의 강제적 안식 조치’라는 측면에서 본질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얼마 전 작고한 여성신학자 마르바 던(Marva Dawn, 1948.8.20-2021.4.18)이 일평생 강조했던 바가 바로 이 ‘멈춤과 안식’이지 않았습니까? 누구나 쉼 없이 하던 일을 멈추는 순간이 필요하며, 잠시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안식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안식』(2001)은 이와 같은 과정을 네 단계 곧 ‘그침(ceasing)’, ‘쉼(resting)’, ‘받아들임(embracing)’, ‘향연(feasting)’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중요한 말들 중 하나가 바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인데, 요즘은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가끔은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교회는 이러한 현대적이고 본질적인 흐름에서 저만큼 빗겨나 있는 듯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주40시간근무제나 주5일제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대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이는 이미 70여 년 전 인류가 선포한 본질적 인권의 시대적 구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이른바 ‘열정페이’가 난무합니다. 대부분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일 년에 한 차례 여름휴가를 제외하고 연월차나 생리휴가 혹은 육아휴직은 언감생심 꺼내기조차 어려운 말들 아닙니까?
우리가 쉬어야 하는 이유는 멈춤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도 아니고 인권적인 배려를 위해서만도 아니라, 이것이 영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뿌리를 깊이 내리라 하셨고(막 4:17)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눅 5:4)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깊음’은 시-공간적인 개념입니다. 인간은 노동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때로는 일을 그치고 쉼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피안을 생각하는 시공간의 체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물며 영적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체험이 더욱 밀도 있고 빈도 있게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았습니다. ‘나는 쉬고 싶다’는 애달픈 외침이 줄어들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나는 쉬어야 한다’는 선언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며, 나아가 ‘우리는 쉬어야 한다’는 엄숙한 선언이 교회를 비롯한 삶의 모든 분야에서 터져 나오기를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