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理致)’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를 뜻한다. 동의어로는 ‘도리(道理)’ 또는 ‘법칙(法則)’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이치에 어긋나는 언행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들 하는데, 이는 곧 도리와 법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논어(論語) 제4편, 이인편(里仁篇) 제 13장에는 예의와 겸양으로 다스림의 이치를 ‘子曰 能以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 爲國 如禮何’라고 설명하고, 14장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과 그에 맞는 행동이치를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15장에서는 관계이치를 설명하는데 하나를 가지고 세상 이치를 꿰뚫는 것을 교훈한다. 오늘날과 같이 관계이치가 파괴되어가는 이 시대에 참으로 주목할 만한 교훈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이다.
공자가 증자에게 자신의 道는 ‘一以貫之’라고 했다. 공자가 나간 후 문하생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忠恕일 뿐이다”고 대답을 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관계이치를 공자는 이것이 자신의 道라고 일깨웠던 것이다. 공자의 도는 仁으로 일관한다. 공자의 仁의 기본 의미는 愛人,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애는 충서(忠恕)로써, 忠은 中+心 즉 마음의 중심으로 마음다운 마음이고, 恕는 如+心 즉 같은 마음으로 진정한 용서는 마음이 하나 됨이다. 이것이 진정한 愛人이요 仁이라고 갈파했다.
내 평생의 삶에도 기본 철학과 목회의 기본 이치가 있다. 첫째가 만남이고 둘째는 나눔이며 셋째가 관계이다. 만남의 내용에는 善緣과 惡緣이 있다. 그러기에 좋은 만남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여정에 있어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나눔은 축복이다. 있어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없거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어찌 축복이라 하겠는가. 그런데 나눌 수 있는 마음도 있고 요건까지 함께 갖추고 있다면 이 어찌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로 얽혀 살아간다. 그러나 그 보다 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보다 지고한 관계는 없다. 이것이 나의 삶이고 목회 이치이다.
30여년의 목회를 마무리하고 은퇴를 하면서 포항중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후임 목사님은 내가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로 기도 중에 택하였고, 성도들의 만장일치로 청빙청원을 받아 위임목사로 奉職하고 있다. 돌아보니 벌써 7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원로목사로, 또 위임목사로 7년을 하루같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父子之情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잠깐 어둠의 세력에 카오스 현상을 경험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聖域의 이치를 통해 비온 뒤 땅이 더욱 굳어지는 자연이치와 같이 교회는 더더욱 평행감축의 행진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담임목사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선임과 행정을 맡은 두 분 부목사님들과 장로님, 권사님들과 함께였다. 이유는 나도 잊고 지나쳐버린 원로목사 생일을 기억하여 찾아온 것이다. 꽃다발과 케익에 금일봉까지 우리 내외 품에 안겨주며 축하하고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해마다 잊지 않고 챙겨주는 그 마음과 섬김 받는 내 마음이 忠과 恕로 어우러졌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여전히 그렇게 챙겨주시는 관계는 父子之情의 관계다.
공자가 증자에게 吾道 一以貫之를 일깨웠을 때 부차적 설명을 따로 하지는 않았음에도 증자는 문하생들에게 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공자의 가르침을 헤아려 설명했는데, 이는 말없이도 많은 것을 일깨우고 말없이도 많은 것을 깨닫는 忠恕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원로목사인 나와 후배 담임목사는 마음 중심으로 진정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복음의 삶을 연주하며 사역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의 이치인가 생각하며 감사한 중에 더욱 감사할 뿐이다.
은퇴를 하면서 후임 목사님에게 2가지 약속을 했다. 하나는, ‘원로목사’는 은퇴 후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사역 기간을 귀히 여겨 교회에서 예를 갖추어 우대하는 것일 뿐, 목회에서는 은퇴이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이 묻지 않는 한 절대로 목회와 연관하여 단 한마디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 뭐라 해도 원로목사와 담임목사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忠과 恕를 통한 진정한 愛의 관계로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여기의 忠은 마음다운 마음, 즉 거짓 없는 마음이며, 恕는 헤아리고 깨닫고 밝게 하는 이치로써 같은(如) 마음(心으)으로 지고한 관계이치를 뜻하는 것이며, 愛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보혈로 맺어지는 십자가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도록 나는 이 이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하나님께서 나의 사역이 녹슬지 않고 닳아서 사용하지 못할 때까지 聖役으로 사용하시라고 축복하며 안수기도를 해 주셨던 故방지일 목사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지금도 나는 매주 전국 방방곡곡으로 다니며 말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렇게 전국을 다니며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 있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이치가 忠恕(마음을 다한 하나됨의 관계)로 연주될 때는 교회가 평행감축을 노래하지만 그 관계가 怨誤(원망과 잘못된 관계)로 연주되면 교회는 카오스 현상을 벗어날 수 없고 벌판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나는 참으로 복에 복을 받은 사람이다. 시편 92:14~15절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의 축복 메시지인 말씀을 옷 입고 평행감축을 노래할 수 있음은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父子之情의 관계이치가 忠恕로 연주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고희의 삶을 사는 오늘도 주야로 기도하는 것은 오로지 아비의 마음으로 아들 같은 담임목사님의 목회가 平幸感祝이기를 축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