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보랜에 이어 1952년 5월 말 한국과 부산을 방문한 이가 바일러(J. N. Byler)였는데, 그는 MCC본부의 구제사역 책임자이자 극동지역 책임자였다. 그는 10일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MCC의 한국에서의 독자적인 사역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남한 인구 2천만 명 중 절반 이상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쟁 피난민이거나 전쟁 중 부상당한 이들 혹은 다른 이유의 극빈자들이었다. 전쟁 과부는 30만 명에 달했고, 전쟁 중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13세 이하의 자녀가 51만7천명에 달했다. 부모를 잃은 고아는 2만5천6백 명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호받지 못하는 나병 환자는 약 5만 명에 달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을 돕는 일은 시급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체적인 선교활동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민간구제기관의 여러 인사들, 그리고 피난민 수용소와 고아원, 어린이집, 보육원, 병원 등을 방문했다. 그리고 MCC는 한국에서 독자적인 구호사역을 시작해야 한다고 인식했고 여러 계획을 추천했다.
이후 MCC는 인접한 일본에 있는 바일러의 후임 극동지역 책임자인 데일 네블을 여러 차례 파송하여 현지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검토하게 했다. 네블(Dale Allen Nebel, 1916-2005)이 처음 한국 부산으로 온 때는 1952년 11월 16일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1953년 7월까지 한국에 체류하면서 MCC 사역의 가능성을 검토하게 했다. 처음 그는 MCC 파송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일했는데, 이 때 여기서 보렌을 만난 일이 있다. 중국에서의 사역을 마친 네블은 필리핀으로 가서 1949년 2월까지 일했다. 그 후 귀국하여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그가 36세가 되던 1952년 바일러에 이어 일본 타이완 홍콩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 한국 등 극동지역 MCC 책임자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일단 홍콩으로 가 재정적인 이유로 홍콩의 MCC사무실을 폐쇄하고 극동지역 사무실을 일본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 8월 일본 나가노 현의 카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리는 선교사여름 수련회에 참석하여 부산에서 일하던 부르스 헌트(한부선), 존 해밀턴(함일돈) 선교사 등을 만나 한국에 대한 정보와 한국에서의 MCC의 구제 사역 가능성을 타진했다. 이때의 정보를 기초로 MCC본부 구제사역 책임자인 J. N. 바일러에게 한국 사역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1952년 11월 16일 부산으로 왔다. 그의 임무는 MCC 한국사무소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UNKRA에서 사역하던 보랜과 함께 사무실과 주거지로 사용할 건물 한 동을 매입했다. 그 외 여러 시설과 사람들을 만나고 12월 4일 일본 오사카의 MCC 극동본부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보낸 기간은 2주간이었다. 그는 한국 방문 보고서에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제기관으로는 UNKRA(유엔한국부흥위원단),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 CWS, CARE, YMCA, YWCA, CCF SCF(어린이 구호연맹) 등과 같은 외국 자선기관이라고 했다.
이 때(1952. 12월 말) MCC 본부는 의류 12톤과 비누 3톤을 한미구제단(American Relief for Korea)을 통해서 한국으로 보냈고, 이 물자는 UNCACK에서 인수하여 전쟁피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네블은 1953년 1월 30일 두 번째 부산을 방문했다. 이 때에는 10일간 체류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3월 6일 미국 MCC본부가 파송한 데일 위버(Dale Weaver) 선교사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왔다. 이제까지는 한국에서의 구호사역을 위한 준비와 탐색의 기간이었지만 위버의 내한으로 공식적으로 한국에서의 MCC 사역의 시작이었다. 네블은 4월 3일까지 한국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 달 뒤인 5월 4일에는 네 번째 한국을 방문했고 한 달 후인 6월 5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해 6월 25일 다시 한국으로 왔는데, 일주일간 체류하고 7월 1일 돌아갔다. 이런 일련의 한국 방문은 MCC의 한국에서의 사역을 위한 준비였다. 이런 방문을 통해 MCC의 한국사역에 대한 몇 가지 제안과 조언을 했는데, 의료선교도 제안했으나 후일 구제사역이 중심을 이루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