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가적 상황
복음병원이 설립될 당시인 1951년 1월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1950. 6.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삼팔선이 무너지고 서울도 함락,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고 조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었다. 1951. 1. 4 후퇴를 통해 수백만명의 피난민들이 남쪽을 향해 내려왔고 그 최종 집결지가 부산이었다.
피난민들은 길거리나 산언덕, 심지어는 남의 집 마당에까지 천막 또는 판자로 움막을 지어 생활을 했다. 초량과 좌천동, 감천동, 영도 산자락에는 대규모 판자촌, 천막촌이 형성되어 당시 부산 인구(30만명)가 갑자기 80만~10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산이 참전국들의 주요 수송항구로서 미군의 군수품들이 도착, 분배되는 항구도시였고 각종 물자와 먹을거리,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많은 전상자들이 부산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다.
전영창은 바로 이런 때 1951년 1월 9일 미국 수송기를 타고 수영비행장으로 귀국했다.
2) 교단적 상황
1950년대 초반은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고신교단 태동기였다. 고신교단은 1946. 6. 23일 진해 하기신학강좌 개최와 1946. 9. 20일 부산 금성중학교에서의 고려신학교 개교, 1952. 9.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총노회(6회)로 개최되면서 고신교단이 정식출범 되었다.
전영창이 미국서 귀국한 1951년 1월은 신사참배자들과 한상동을 중심한 출옥성도들 간에 신사참배문제와 고려신학교 인가 문제 등으로 첨예한 대립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6.25피난시절인 1951. 5. 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최된 제36회 총회에서도 계속 고려신학교가 인가를 받지 못하고 노회에서도 총회에서도 출옥성도들이 배척을 당하자 결국 1952. 9.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출옥성도들 중심으로 경남법통노회가 열려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고신이 공식적인 출범을 하였다.
전영창은 아직 고신교단이 형성도 되기 전에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서 무엇이든 자신의 할 일을 찾기 위해 귀국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귀국후 병원을 설립하는 일로 한상동, 차봉덕, 장기려 등과 함께 하던 중 1년 9개월 후 고신교단이 출범할 때 자연스럽게 고신교단에 소속이 되었다.
3) 전영창의 귀국과 복음진료소 개설
전영창은 1947년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1년 수학후 웨스튼 신학대학교로 옮겨 수학, 졸업)로 건국이후 유학생 1호로 출국하여 신학을 공부하다가 1950. 6. 25 전쟁소식을 듣고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려 귀국을 결심하자 교수들과 학우들이 극구 만류하다가 졸업이라도 하고 가라고 했다.
계속 귀국을 애원하는 전영창을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없자 학교는 졸업식을 2개월 앞당겨 1월 초에 전영창을 위한 졸업식을 거행해 주고 교수들과 학우들이 모금해 준 5,000불을 가지고 1951.1.9일 미국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귀국했다.
그 5,000불로 무엇을 할까 기도하던 중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한 것과 항생제 등 의약품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병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노르웨이인 넬슨의 제안을 받고 1951. 1. 15일 제 3영도교회 창고에서 차봉덕 원장을 초빙하여 복음진료소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