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활동하기 위해 MCC의 파송을 받고 내한한 사실상의 첫 사역자는 1953년 3월 내한한 어네스트 레버와 데일 위버였다. 이들의 임명 기간은 3년이었다. 이들이 내한하게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달라스 보렌과 MCC극동책임자인 데일 네블의 정지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버는 MCC한국 책임자였고, 레이버는 재정관리 및 구제물자 관리 책임을 맡았다.
어네스트 레이버(Earnest Dee Raber, 1927-2018)는 오하이오주 투스카라와스 카운티 출신으로, 세계2차대전 집총거부 신앙을 인정받아 pax 요원으로 와싱톤 주에서 대체 복무를 한 바 있다. 그 후 오하이오주 보링 그린에 위치한 보링 그랜 주립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50년 졸업했다. 졸업 후 플로리다 주 윈터 헤이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한 바 있으나, MCC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1953년 3월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1956년 1월까지 약 3년간 부산에서 일했다. 한국에 온지 7개월이 되던 1953년 10월 7일에는 부산의 교회의 한 한국인 교회에서 메리 미첼(Mary Milster Mitchell, 1922-2010)과 결혼했다. MCC요원으로 사역을 마감한 레이버는 서울로 이동하여 감리교 선교사로 4개월간 더 일하고 1956년 5월 고향 오하이오주로 돌아갔다.
데일 위버(Dale Albert Weaver, 1918-2011)는 캔사스 주 하퍼 카운티 출신으로 7남7녀 중 11번째 자녀였다. 그의 아버지는 1907년 목사가 되었는데, 어머니는 1925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2년 후 재혼했다. 데일 위버는 고센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고 농사를 짓다가 회사원으로 일했다. 그러든 중 전쟁이 일어난 한국에서 봉사하기로 작정하고 한국행을 자원하여 앞의 레이버와 더불어 펜실베이니아 주 아크론의 MCC본부에서 선교훈련을 받고 1953년 1월 MCC선교사로 임명되어 어네스트 레이버와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군 군용기를 타고 1953년 3월 6일 부산에 도착했다. 위버는 첫 한국 MCC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한국본부 주소는 부산 부민동 2가 5-9번지였다. 한국인 주택을 구입해 약간 수리하고 사무실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우편물 수납을 위해 부산우체국 사서함 112호를 사용했다. 전화는 따로 없이 인접한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부산 416번의 전화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한국인 행정 직원 두 사람을 채용하였다. 주요 정책과 예산 집행은 미국 본부가 관장했고, 프로그램 운용과 예산안 집행은 한국 본부가 맡았다. 그리고 메노나이트교회가 보내는 구호품은 UNCACK, 미국한국구제회(ARK) 그리고 세계교회 종사회(CWS)를 통해 한국으로 전달되었다.
1953년부터 1954년까지 1년 예산 내역을 보면, 복지, 건강, 교육, 구제를 위한 월 예산이 1,650불, 구제물자는 211,000불에 해당했는데, 식품은 100톤, 의료와 침구 50톤, 비누 5톤,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 15톤(7,000개), 원면과 원모 50톤이었다. 그런데 이런 예산 중 직접적인 전도나 교회 사역을 위한 예산은 없었다. 즉 MCC는 메노나이트교회를 선전하거나 교회 설립을 목표하지 않았고, 순수한 구제사역에 집중하여 구호 대상자를 신자들에게로 제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53년 10월 이후에는 미국 MCC가 보낸 456톤의 구호물자가 들어왔는데, 식료품이 156톤, 우유가 140톤, 의류 신발 비누가 160톤이었다.
한국에서의 MCC사역은 4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미 내한하여 UNCACK에서 일하는 달라스 보랜의 사역, 메노나이트실업학교 설립을 위한 기초 작업, UNCACK, ARK, 그리고 CWS를 통해 우송된 구호물자 배부, 그리고 한국에서 전개할 예비 사역과 장비의 조달이 그것이었다. 이 중 대구 인근인 경산에 메노나이트실업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학교 부지 매입비로 10,250달러, 학교를 위한 각종 수리비로 1,500달러, 운영 행정 비용과 장비구입비로 1,200달러가 소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