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MCC의 조직과 한국에서의 사역의 시원, 초기 사역자들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제 구체적으로 한국전쟁기 MCC의 초기 사역이 어떠했는가를 몇 가지 항목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구제 사역이었다. MCC의 대표적인 활동이 구제활동인데, 이는 사역의 최우선 순위였다. 인간의 가치와 인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메모나이트 정신에 따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어 생존하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사역이었고, 이것이 바로 식량지원이었다. 지원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있기 때문에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에는 79톤의 구호물자를 보냈는데, 우유와 식품이 중심이었고 그 외 의류 성탄절 선물꾸러미 등이었다. 이들이 지원 대상은 부산이나 경남지방 뿐만 아니라 서울 인근, 인천과 수원, 38도선 이북의 화천, 그리고 울릉도 등까지 확대되었다. 그것은 MCCC가 세계교회 봉사회(CWS)와 동역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량 지원 외에도 소고기 통조림 등을 공급하고 부산과 대구 등지에 우유급식소를 설치하고 어린 아이들의 건강과 위생을 지켜 주었다. 구호통조림 통에는 ‘Food for Relief,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를 넣어 무상 공급이라는 점을 알리고, 이를 판매하거나 되팔아서도 안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무상 구호 식량을 판매하여 특정인이 사유화하지 못 하게하기 위한 조처였다.
둘째, 직업교육이었다. MCC는 고아들의 자립갱생을 위해 직업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1953년 5월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천동의 78에이커(약 9만5천평)의 땅과 거기 부속된 27채의 건물을 구입했다. 47에이커의 땅은 운크라(UNKRA)의 지원으로 구입하였고, 논과 밭과 언덕이 있는 31에이커는 한국정부로부터 임대한 것이다. 이 토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농업실습장인 농도원(農道園)이었으나 해방 이후 한국정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이 학교 사업은 MCC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이곳에서 남자 고아들을 위한 중등과정의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여 살아갈 수 있게 구상한 것이다.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이사회를 구성했는데, 초기 사역자인 위버 선교사를 비롯하여 경상북도 도지사, 경상북도의회 의장, 경북대학교 총장 고병간 박사, 사회사업가협회장인 이영식 목사, 대구동산병원 부원장 황용운 박사,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로버트 콜스(L. Robert Kohls, 1928-2006) 선교사 등 8명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가 1953년 10월 개교한 메노나이트실업중고등학교였다. 일차적으로 전쟁고아들을 위한 학교였음으로, 학교는 무상교육만이 아니라 의류와 숙식을 제공하는 기숙학교로 출발했다. 첫해에 14명의 고아가 입학했고, 학교교육은 1971년까지 약 20년간 지속되었고, 그 후 학교는 폐쇄되었다. 한국은 급속도로 산업가 이루어지고 삶의 환경이 개선되자 MCC는 더 시급한 도움이 요청되는 월남으로 물자와 인력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첫 교장 콜스는 한국이름 고을수(高乙秀)로 불렸는데, 1953년 10월 내한하여 1956년 3월까지 2년 6개월간 교장으로 재직했다. 오하이오주 달라스카운티 출신인 그는 드레이크 대학(Drake University)에서 1년간 수료하고 제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5월 28일 징집 서류를 제출했고, 1945년 12월 31일 입대하였는데 전후 1946년 한국에 주둔했다. 한때 대구 동촌의 K2공군부대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후 드레이크대학에 복학하였고, 1949년 6월 17일에는 노르마 차펠(Norma Glee Chappell)과 혼인했다. 대학 졸업 후 3년 교사로 일했고, 메노나이트교인은 아니었으나 어려운 환경에서 견딜 수 있는 인물로 간주되어 교장으로 임명을 받고 내한한 것이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는데, 메노나이트교회와 더불어 평화교회를 지행했음으로 그를 교장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일 『한국식으로 사고하기 Learning to Think Korean』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이런 문서를 보면 그는 매우 지성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