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갈등했다. 그리고 지금도 갈등하고 있다.
이 방법으로 하면 사람이 변할 줄 알았다. 해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저 방법으로 변화를 유도했다. 그렇게 저 방법도 아닌 모양이다. 새로운 방법으로 해보면 어떨까? 선택과 번복,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청소년을 향한 사역이 벌써 햇수로 35년째이다.
“35년 동안 하고 있지만 이 사역이 나에게 맞는 것일까?” 여전히 물음표이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갈등과 고민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데 왜 빨리 변하지 않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울까?” “더 많은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덧 바른 방향보다 속도에 조급해하며 갈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쯤되니 정리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청소년들도 35년을 하고 보니 철이 들어 성인으로 자기의 역할을 하나씩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속도, 양, 수준만큼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모두 변화되어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은 일하고 계셨다.
“내가 주님보다 앞서 있었구나. 내가 성령보다 앞서 나갔구나. 내가 조급했구나”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서야 깨닫는다. 참 미련한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싶다.
둘째, 아기를 낳고 기뻐하며 그렇게 좋아하고, 배밀이 할 때 아장아장 걸을 때는 또 얼마나 귀여워했나?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되니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이 많이 아프다. 이 자녀가 청년이 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다시 자신의 부모와 같은 상황이 되면 그 때 자기의 모습을 알게 될까?
신앙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는데, 육적 자아가 자라고 자기 철학이 생기면서 신앙의 성장에서 반항기가 올 때, 옆에서 보고 찾고 기다려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아버지는 잘도 견디어 주고, 잘도 참아 주며,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나는 어떤가?
셋째, 양이냐? 질이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디 쉬운가?
모든 목회자들이 성도의 양적 부흥과 질적 성장을 함께 바란다. 둘 다 건강하게 성장하며 든든한 교회를 세우길 원한다. 나도 이 둘의 조화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질적 성장이 안 되어서 고민일까? 아니면 양적 성장이 안 되어서 더 갈등하는 것일까?
부모님들은 자녀가 키와 몸이 자라기를 원할까? 아니면 공부, 성적, 인격도 모두 다 자라길 원할까? 분명 겉으로는 둘 다 조화롭게 자라길 원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말은 자녀가 성경적 세계관으로 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란다고 하지만, 막상 반에서 성적이 하위권 이거나, 대학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이 안되어 집에서 놀고 있을 때, 부모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교회의 질적 성장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양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넷째, 그래서 지금도 나는 두 나라에서 갈등한다.
세상과 교회, 과연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교회에서도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한가?
배우고 공부할수록 세상은 교회의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데, 성경 중심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으로 살아내야 하는 삶을 쉽지 않다. 이건 평신도나 목회자나 다 똑같은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갈등하며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주님, 바른 분별력을 주옵소서! 성령님이 내 속에서 새 영으로 역사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를 주옵소서”
끝나지 않는 갈등, 멈출 수 없는 사역 속에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물으며 방향을 결정하고 한걸음씩 나아간다. 그래서 나는 갈등하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