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강도사 시절부터 외부집회 설교를 시작했다. 당시 청년부를 맡고 있다보니 주로 대학청년부 집회가 주를 이루었다.
2008년 갑작스레 브니엘고 교목으로 부임해서 사역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청소년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외부집회 사역의 변화를 가져왔다. 2008년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청소년 사역자가 되어 있었다. 청소년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는 어느정도 유효기간이 지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특수를 누리고 끝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나는 쉰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가 되었다. 청소년 사역자로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이다. 청소년 사역자로는 시니어의 선을 넘어선 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친구 목사들이 전부 담임목회를 하고 있으니 청소년 사역자의 나이 경계선은 넘어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장에 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해왔던 집회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청소년과 교사들을 대상을 집회를 한지 15년이 되었다. 2008년 이후 함께 사역했던 이 분야의 다른 동역자들도 여전히 건재하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잘 변화되어 왔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후배 사역자들의 등장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는 청소년 사역자라는 전문성만을 가지고 목회를 하기에는 길이 너무 좁고 힘들다는 것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특화되어버리면 목회 현장에서 다른 길이 열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교회들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명의 전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긴 시간 같이 호흡하고, 지지해주어야 하는데, 전문가를 키우기보다는 교회의 한 부서만을 맡아서 사역하는 사역자로만 접근을 하니 다음 세대를 연결한 전문가들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내 또래의 사역자들, 그리고 선배들이 여전히 이 분야의 전문 강사로 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들마다 검증된 사람만을 강사로 섭외하니 다른 사람들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강사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히 교회들마다, 아니 교계가 의미있게 보아야 할 사안이다.
나는 이미 우리 학교에서 제자 부모들보다 나이가 더 많아졌다. 나는 15년 전에 내 나이 쉰이 넘으면 사역의 유효기간의 법칙에 따라 청소년들이 아닌 부모와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목회로 전환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십대들과 이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을 중심으로 그 만남은 이어져 가고 있다.
물론 사역은 나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 사역의 현장에서 꽃을 피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뒤를 돌아보면 뒤를 이을 목사들, 그리고 그 뒤를 또 이을 후배 사역자들의 수가 손에 꼽힌다는 것은 교계 전체가 다음세대를 위해서 위기의식을 가지고 사람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기다림 속에서 사역자는 만들어진다. 부서의 양적 늘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 집중하는 교회들이 늘어가길 간절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