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1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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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복음진료소 원장으로 초빙.  

1948년 부산 교통병원 산부인과에 취업했던 차봉덕은 1950년 봄에 부산 초량동 어느 2층집을 임대하여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업했다. 몇 달 후에 6. 25 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51년 1월 9일에 귀국한 전영창이 초량의 차산부인과에 근무하던 차봉덕을 몇번이나 찾아와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복음진료소 원장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박희천목사의 부인-차진실 사모의 증언>

이때는 전영창이, 외삼촌이 근무하던 국제연합민사원조사령부(UN CAC)를 찾아가 노르웨이 출신의 구호담당 책임자인 의사 넬슨을 만나 항생제 등 구호의약품 조달문제로 상의를 하던 중 차라리 병원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의약품을 지원하겠다는 넬슨의 조언을 듣고 병원설립을 위한 의사를 급히 찾던 때였다.

이에 차봉덕은 “너는 예수 믿고 결혼하지 말고 의사가 되어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 주고 섬겨라” 는 이북에 계신 할머니 말씀을 떠올리고 운영하던 차산부인과를 미련 없이 접고 전영창을 따라 1951. 1. 15일 영도로 와서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진료를 시작한 것이 ‘복음진료소’였다. 이때 그녀는 초량 차산부인과에서 사용하던 분만기계 등 산부인과 관련 의료기자재를 다 가지고 가서 진료를 했었다<차진실사모, 맹숙희 간호사 증언>

전영창이 차봉덕 원장과 함께 복음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할 때 전영창은 매일 의약품 50인분을 받아와서 차봉덕 원장의 환자진료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부대에서 강냉이와 밀가루를 지원받아 가마솥에 끓여서 전재민들을 열심히 구호하고 있었다. 이때 죽을 먹기 위해서 선 줄이 200미터나 되었다.<전영창의 아들 전성은증언>

 

5) 장기려박사 취임으로 사임 

초대원장 차봉덕에서 불과 6개월 만에 장기려 박사로 원장이 바뀌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가벼운 일반 환자들은 산부인과 의사인 차봉덕 원장이 진료할 수 있었지만 외상환자나 수술환자는 진료가 불가했다.

6.25전쟁으로 전상을 입은 외과 환자들의 진료를 위해서는 외과의사가 필요했다. 이에 전영창 선생은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고, 마침 외과진료와 수술이 가능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받아 1951. 6. 21일 전영창이 한상동의 안내로 김상도 목사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복음진료소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장기려 박사가 제3육군병원을 사직하고 1951. 7. 2일자로 복음진료소로 부임해 왔다. 이에 차봉덕은 초량으로 다시 와서 차산부인과를 개업하고 4명의 조카들을 거두어 삼일교회(한상동 목사)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6) 차봉덕의 늦은 결혼 

피난 온 4명의 조카를 거두어 양육과 교육, 그리고 전영창과의 복음진료소 개원과 차산부인과 개원 등으로 정작 자신은 결혼도 못하고 지내다가 같은 외과의사인 황영갑과 1958년 늦은 결혼을 했다. 남편 황영갑은 중국 길림성에서 출생하여 하얼빈의대 졸업, 신의주 방직공장 병원장, 6.25때 인민군 후방 군의관으로 참전, 북한의 후퇴 때 탈영을 하여 미 8군 의무관,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북에서 이미 결혼을 하여 6.25때 북한에 징집될 때(1950. 9월) 6세, 3세. 1세의 자녀들이 있었지만 6.25 전쟁으로 부인을 포함 전 가족이 사망하자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고려신학교에 입학 신학을 공부하였다.

복음의원 초창기 시절 농어촌 무료진료 전담의사로 지원해서 장기려와 함께 무의촌 진료를 나갔고 이때 차봉덕에 대해서 조금은 알았겠지만, 차봉덕이 장기려 박사에게 바톤을 넘기고 초량으로 와서 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함으로 떨어져 지내다가 황영갑의 절친이자 중, 고, 대학 선배인 신영희 의사의 중매로 1958년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어 부산 삼일교회 한상동 목사의 주례로 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차봉덕의 나이 38세때이다. 이듬해 큰 딸 황은경(59년생), 은성(61년생), 은희(64년생) 세 딸을 차례로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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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교회에서 한상동 목사님 주례로 황영갑 의사와 차봉덕 원장의 결혼식 장면

 

7) 동두천 이거와 진주 복음병원 

차봉덕이 1948년 부산으로 와서 10여년을 살다가 황영갑과 결혼 후 부산을 떠나 동두천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의 남편 황영갑의 자서전에서 “우리 내외가 결혼했을 때에 나는 빈털터리요, 집사람도 개업할 돈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볼 때 당시 두 사람이 조카들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 이때 큰 조카 차진실은 삼일교회 전도사였던 박희천전도사와 막 결혼(1957.1.17)하여 독립한 이듬해였다.

그때 마침 동두천에 살던 황근옥 선생이 아무 차용증서도 받지 않고 50만원이라는 거금을 빌려주어 병원개업을 해 보라해서 동두천에서 개업을 했는데 병원이 크게 번성하여 주변에 땅도 많이 사게 되고 일 년 만에 황근옥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아 드리고 이자도 넉넉히 계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진주에서 부름이 있었다. 일제 말기에 폐원했던 진주 배돈 병원 후신으로 1955년 8월 15일에 설립된 진주복음병원의 초대원장 한규상(부산 복음병원 내과과장 출신)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을 하자 제2대 원장으로 황영갑을 초빙했고 1959. 9.10일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황영갑은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부인 차봉덕은 진주 우체국 근처에 ‘차봉덕 의원’을 개원하여 진주 최초 부부의사로 병원 일에 힘쓰며 진주교회(전 봉래동교회, 옥봉교회)장로(1961년 장립)로, 차봉덕은 여전도회 회장 직을 맡아 14년 동안 교회를 지사충성하였다.

1972.5.14일 차봉덕은 남편을 따라 진주로 온지 14년 만에 경영하던 두 병원을 폐원 정리하고 진주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이는 남편 황영갑이 목회자로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서울 논현동에서 영동제일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다 의사직과 장로직, 여전도회장직을 그만두고 평생 복음을 위한 목회자로 결단하였다. 차봉덕이 남편의 목회를 위해 진주에서 서울로 떠날 때 그의 나이 53세였다(진주교회 조헌국장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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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 고신대학교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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