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기에도 신학교육은 계속되었는데 앞에서는 고려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피난지 학교에 대해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장로회신학교는 어떠했을까? 장로회신학교는 1948년 6월 3일 서울 남산에서 개교했다. 학교의 설립일에 대해서는 3일, 9일, 20일 설이 있으나 20일은 주일이므로 이날은 아닌 것 같고, 3일(목) 혹은 9일(수)일 것이다. 학교를 설립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박윤선 목사를 임시교장으로 하여 부산진 좌천동에서 개교했는데, 교장으로는 만주에 계시던 박형룡 박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송상석 목사는 사지를 넘어 만주로 가서 박형룡 목사 가족을 안전하게 귀국하게 하였고, 박형룡은 부산으로 와 1947년 10월 14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과 박형룡 교장 사이에는 이견이 제기되었고 결국 박형룡은 교장으로 취임한지 불과 5개월이 지난 1948년 초 고려신학교를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가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1948년 6월 개교한 장로회신학교였다. 개교하기에 앞서 5월 20일에는 서울 창동교회에서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이사회를 조직하였고, 개교식은 6월 3일 혹은 9일 서울 남산의 과거 조선신궁 터 자리에 있던 성도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개교식 이후 성도교회당이 장로회신학교 임시교사로 사용되었다.
장로회신학교는 1회 졸업생 25명, 2회 졸업생 38명, 3회 졸업생 35명을 배출하고 전쟁의 발발로 1950년 9월 학기를 개교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9.28 서울 수복 후 늦게나마 개강했으나 어수선한 가운데 두 달을 채웠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1.4 후퇴였다. 1951년 1.4 후퇴 때 교수와 학생들이 다 피난길에 올라 수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부산에서 다시 장로회신학교가 개강하게 되는데 그 때가 1951년 5월 1일이었다. 임시교사를 수색하던 중 부산진교회 당회의 허락을 얻고 부산진교회당을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진교회 담임목사는 김성여(金聖與) 목사였는데, 당회 기록에는 장로회신학교 임시교사 건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없다. 일반적으로 피난지 부산에서 개강한 날을 ‘1951년 봄’이라고 말하는데, 당시 교수이기도 한 권세열(Francis Kinsler) 선교사는 1951년 6월 16일자로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5월 1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 등록한 학생은 275명에 달했다고 한다. 권세열 선교사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장로회신학교는 1951년 5월 1일, 부산진교회 건물에서 피난민학교로 다시 개학하였다. 우리들은 한 100여명 정도의 학생들이 오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현재 등록된 학생 수는 275명이나 된다. 사실 신학교에 온 대부분의 청년들은 전쟁터에 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올 수 있었다.” 이어서 학생들의 기도생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오늘 이른 아침, 학생들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였다. 학생들이 매일 자신들의 새벽기도회를 스스로 인도하고 있으며, 교수들은 별로 참석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찬송을 부르고 성경말씀을 봉독하고, 말씀을 증거한 후 기도를 드린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약 30분 이상 기도를 드리며, 많은 이들은 눈물로서 하나님께 호소한다. 저들은 음식이나 집 같은 저들에게 핍절한 물건들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보다 나은, 진실된 신앙생활과 한국교회와 전체 한민족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것이다. 우리 서방 세계에서는,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위하여 헌신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교장은 박형룡 박사였고 한경직 권세열 등이 교수였다, 그해 7월에는 제4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졸업생은 66명이었다. 평양 출신으로 제주도에서 피난하던 임인식은 가족은 제주도에 남아 있고 본인만 부산으로 와 공부하고 4회로 졸업했다. 전쟁 중 부산에서의 제4회 졸업식이 마지막 졸업식이 되었다. 장로교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문제로 갈등하였고, 두 신학교를 통합하여 총회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했기 때문이다. 비록 조선신학교는 이에 불응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