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요한에서 예수님으로
마태복음 3장 1~12절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가장 부러운 인물 중 하나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주목을 받으려면 사람들이 밀집된 곳에서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우들도 예수님께 갈릴리에 있지 말고 예루살렘에서 사역하도록 권했던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4절을 보면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인적이 없는 유대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유대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찾아다닌 설교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사람이 많은 곳을 기웃거리는 요즘 사역자들과 비교됩니다.
또 그는 무엇에도, 완전한 자유인이었습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들은 제사하러 오는 이들이 드리는 것으로 먹고살다보니, 많은 제물을 드리는 이들에게 매였습니다. 아무래도 왕들이 가장 많은 제물을 바치다보니, 제사장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생활을 해결했던 선지자들은 비록 가난한기는 했지만,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왔습니다. 그들은 권력에 매이지 않고 소신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을 입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사람에게 매여 소신있게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과 비교됩니다.
그러면서도 요한의 메시지는 강력한 폭탄 같았습니다. 강포한 군인들과 물질에 눈먼 세리들도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칭찬하고 축복하면서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쳤고,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외쳤습니다. 만약 요즘 이런 설교를 하면 그날로 쫓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설교에는 권위가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그의 탄생과 사역이 예고되었을 정도로, 탄생부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매우 늙은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에게서 기적적으로 탄생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때로 저는 한국교회에 세례 요한 같은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합니다. 그것은 요한은 우리에게 <나를 보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예수님을 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함께 예수님의 하실 일을 증거했습니다. 3장 11~12절입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자신은 기껏해야 회개를 위한 세례를 베풀 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후회하게 하고, 고백하게 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게 하는 것까지가 요한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지은 죄 자체를 없앨 수는 없고,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며, 심판하실 분이었습니다. 결국 요한은 <내가 대단해 보이지만, 나를 보지 말고, 진정한 구원자인 예수님을 보라>고 외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대단한 설교자, 선교사, 사역자들이 있지만, 우리 구주는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 같은 사역자가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예수님만 바라볼 때, 거기 희망이 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충만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