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학교: 김치선 박사가 설립한 대한신학교도 전시 중 부산에서 신학교육을 시행하였다. 대한신학교는 서울의 남대문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치선(金致善, 1899-1968)가 1948년 설립한 야간신학교였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김치선은 캐나다장로교 영재형(Luther Young)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함흥의 영생중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하교를 졸업하고 1927년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한 학기 수학한 후 영재 형 선교사를 따라 일본으로 가 고베중앙신학교에 편입하였다. 1931년 3월, 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다시 영재 형 선교사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33년 5월 졸업했다. 곧 달라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복음주의신학교(Eevangelical Theological College)로 불리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 1936년 5월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구약을 전공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졸업 후 일본으로 돌아가 영재형 선교사를 도와 재일한인교회를 위해 일하던 중 1944년 3월 귀국하였고, 약 2개월 후인 1944년 5월 서울의 남대문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는데, 남한의 모든 교회로 전파되었다. 얼마 후 남대문교회는 한경직의 영락교회와 더불어 서울을 대표하는 교회로 부상했다. 이 교회 담임목사로 일하면서 1948년 8월 야간신학교를 개설했는데 그것이 후에 대한신학교로 발전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치선 박사는 1946년 9월 20일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했을 때 개교 강연자로 초청받아 ‘신학과 신조’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바 있고, 이 일로 고려신학교 교수로 일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바 있으나 사양하고 자신의 교회당에서 야간 신학교를 개설한 것이다.
이북 출신이기도 했던 김치선은 해방 이후 월남 인사 중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수학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장로회야간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곧 이 학교는 곧 대한신학교로 개칭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첫 민족복음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300만만 구령운동’을 전개했는데, 손양원도 이 운동에 동참했던 경남의 인물이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도 신학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에 대한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1950년 5월에는 첫 졸업생 18명을 배출했는데 한 달 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김치선은 6월 28일 삼각산으로 피난을 떠났고 그 이후 부산으로까지 피난 오게 된다. 불가피하게 신학교육도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게 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갔으나 그것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어 다시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른바 1.4 후퇴였다. 그날 목요일 아침, 서울의 강은 얼어 붇고 겨울의 세찬 바람이 피난민에게 아픔을 더했다. 다시 피난민들은 부산으로 몰려들어 1951년 3월 부산의 인구는 12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수용하기엔 주거 환경이 턱없이 부족했다. 곧 서울 복귀가 어렵다고 판단한 김치선 박사는 그가 거주하던 대청동의 중앙교회 노진현 목사와 대한신학교 임시교육에 대해 의논하였고,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신학교육을 재개하였다. 대한신학교 교육을 시행한 곳이 어디인가는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노진현 목사의 중앙교회당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노진현과 김치선은 일본 중앙신학교 동창이었고, 노진현이 분교장을 맡은 점을 고려해 볼 때 전시 중 다른 공간을 찾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부산에서 임시교육은 약 2년간 계속되었다. 제주도에서도 1951년 9월 윤필성 목사를 교장으로 임시학교를 열었으나 겨우 한 학기 후 폐쇄되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의 체결되자 그해 9월 부산 분교는 서울로 복귀했다. 복귀와 더불어 대한신학교는 4년제 신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김치선 박사는 교장으로 취임했다. 전쟁 중인 1951년 5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가 개교했을 때 김치선은 교수로 초빙되었으므로 김치선은 자신이 설립한 대한신학교와 총회신학교, 양 학교에 관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