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져버린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세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한 군데가 세습 문제 때문에 얼마나 큰 물의(物議)를 빚고 있는지를 목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 작업장에서 큰 사고 하나가 발생하기 전에 동종의 크고 작은 사고가 수십 · 수백 번 이미 발생한다는 ‘하인리히 법칙(1 : 29 : 300)’은 산업재해 분야의 고전이지만 인간사회의 여타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유독 그 교회만 세습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계 전반에 걸쳐 아름답지 못한 세습이 만연하다가 마침내 교회를 넘어서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반사회는 과연 “세습”으로부터 자유로울까요? 교회에서조차 세습이 문제가 되는 시대라면(1:), 이미 그 사회에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습 현상이 많은 영역에서(29 : 300) 횡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최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선(人選)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각료 후보자들 하마평이 오르내리면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사실들이 있지요. 바로 ‘자녀’ 문제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의사 출신의 한 인사는 자질 논란도 일었지만 결정적으로 자녀의 이례적인 의대 편입 및 자신이 병원장으로 근무하던 곳에서 인턴 과정을 거친 점 등이 집중적인 성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외교부 수장으로 거론되는 인물 역시 한 자녀가 이중국적을 가진 채로 특례입학을 했다는 문제 등이 불거져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판사 출신인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 역시 슬하의 아들과 딸이 ‘아빠 찬스’를 십분 활용해서 자신과 관련 있는 기관이나 회사에서 인턴 활동을 하거나 아예 취직의 기회를 얻지 않았나 하는 거센 의구심에 직면했습니다. 이러니 앞서 유사한 문제로 실각하거나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들킨 죄’밖에 없다는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유사한 사례들을 전수(全數) 조사해 보자는 파격적이지만 메아리 없는 제안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영국의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2014)에서 이미 현 시대를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 시대로 규정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세습사회’를 경고한 바 있습니다. 한국도 얼마 전 한 잡지에 “우리는 ‘세습사회’에 살고 있다”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김정헌, 2020. 2). 그렇다면 어떤 “세습”일까요? “한편에서는 부모가 사교육, 인맥, 문화자본 등을 통해 자식에게 학벌과 일자리를 물려주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손쉬운 계층의 대물림이 심화되고 있다.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바야흐로 ‘상속의 시간’ 곧 ‘부동산 세습사회’가 다가오고 있다.”(안선희, 2020. 10) 현대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습은 이와 같이 전(全)방위적입니다. 사회 계층에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일대학교의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는 “엘리트 세습”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귀족주의(A New Aristocracy)가 중산층을 붕괴시킬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반면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세습이다!”라고 일갈하면서 한국은 중산층이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세습하려 한다는 견해도 등장했습니다(조귀동, 『세습중산층사회』)
“세습”이 무조건 악하다는 명제는 항상 옳지만은 않습니다. “3대 째”라는 말만 검색해도 “3대 째 금하칠보 장인”, “3대 째 화살 만드는 가족” 등 “세습(?)”을 칭송하는 많은 기사를 찾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4대 째 한지 명인”, “4대 째 나침반 장인” 그리고 “5대 째 옹기 장인”은 어떻습니까? 이런 세습은 재산과 권세가 아니라 가난과 희생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타인이나 공동체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런 세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세습”이 있었습니다. 귀족사회였으니 계층의 세습은 당연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고넬료(Cornelius)”(행 10:1)나 “글라우디오(Claudius)”(행 11:28, 23:26)는 당대 최고의 로마 귀족 가문들이었습니다. 계층뿐만 아니라 신분을 세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직전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라고 하지 않았던가요?(요 18:13) 하지만 예수께서 질책하셨던 세습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도 세습을 하셨습니다. 요셉 대신 목수로서 가계를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세습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