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희미해져가는 예배와 찬양의 소중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지적을 무척 부담스러운 판단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새로워질 방법은 찾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한계는 종합적으로, 복합적으로 생각한다고는 하나 그렇지 못하고 편협하거나 단편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에 관하여서는 끊임없는 고민과 변화를 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예배와 찬양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예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정확한 답은 성경에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의식행위 즉 예배와 찬양을 위하여, 이것을 제대로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아예 한 지파를 통째로 그 일에만 전념토록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이 당신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또 중하게 여기시고 좋아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다양한)을 강조하고 이를 행할 것을 권고하시고 명령하셨는데 사실 이것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바르고 진실되게 행하였을 때 인간이 얻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크고 많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땅한 의무이자 책임인데 더할 수 없는 축복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배만 잘 이뤄진다면 속된 표현일지 모르나 개인은 물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사형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거룩한 백성으로 풍성함을 누리며 우아하게 이 땅위를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잠깐 시간을 되돌아보면 음악적으로 바로크시대, 고전시대를 지나면서 예배에도, 그 속에서 행해지는 음악 즉 찬양의 경향도 많은 변화와 함께 시대적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져왔다. 의식에서나 음악의 스타일이 많이 바뀌어졌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낭만시대를 거치고 현대에 와서는 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이 영적으로 윤택하여졌으며, 믿는 자의 수가 나날이 더하여지고, 세상은 주의 뜻대로 바르고, 정의롭고, 평안하여졌는가? 그 반대의 시간들이 흐르고 있음에 주목하고 긴장하는 것이다. 축약한 시대현상의 요약이지만 실로 수많은 일들이 교회공동체 내외로 일어났다. 긍정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부정적이고 교회답지 못한 사건들도 실로 많았다. 지금으로서는 한마디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을 정도가 아닌가 생각되어지는 상황이다.
종교개혁시대의 예배를 잠시 들여다보면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혹이라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까 고심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영적 코드가 맞지 않는 것이 그럴듯한 탈을 하고 교회공동체로 들어와 전체를 오염시키는 일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다. 매우 중요한 문제로 심각성을 가지고 오늘날 반듯이 유념하고 경성하여 주의해야할 일이다. 영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가?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기에 따라 이해와 해석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영적으로 매우 지혜롭고, 맑았음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그 어렵고 힘든 사명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신실한 예배자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확신한다.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받았으니 무엇이 무섭고 두려웠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너무나 나약하고, 맥없고, 힘없는 크리스챤들은 혹 아닌가?
이 시대에도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 아니 지속되고,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별히 예배와 찬양의 갱신은 반듯이 있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형식의 변화를 포함한 예배 속 음악의 사용도 심도있게 고려되어야 하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모든 교인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집중할 수 있을까?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가 절실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