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일어나자 기독교회가 중심이 되어 구호 혹은 구제 사업을 기획했고 나라를 위한 구국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첫 조직이 ‘대한기독교구제회’였다. 남침 소식을 들은 서울의 한경직 목사와 여러 교회 지도자들은 서울 종로의 예수교서회에 모여 피난민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 기독교 구제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구체적인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해산되고 말았다. 7월 3일에는 대전으로 피난 온 한경직 김창근 황치헌 목사 등이 대전 제일교회당에 회집하여 대한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였다. 한경직 목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전세에 밀려 7월 17일에는 대구 기독교청년연합회(YMCA)에로, 9월 이후에는 부산으로 옮겨가 본부를 두고 대구와 부산 등 남한 30여 개 처에 지부를 조직하고 국방부와 사회부와 협력하면서 선무(宣撫),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을 실시하여 구국활동과 구제, 인보(隣保)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3천 여 명에 달하는 기독교 의용대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가케 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전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카츄사 부대와 육군 통신학교 등 특수 업무에 동참하게 배려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고 3개월간 공산치하에 있었던 서울이 해방을 맞았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서울의 교회는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었고 피난민은 남으로 향하여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난민구호대책이 시급했다. 1월 9일 노진현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부산중앙교회당에서 모인 기독교 각 교파 지도자들은 ‘기독교연합전시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한경직 목사는 회장으로 류형기, 김창근, 황종률 목사는 부회장으로 김양선 목사는 총무로 피임되었다. ‘기독교연합전시대책위원회’는 ‘대한예수교각교파연합 신도대회’를 계승한 조직으로 볼 수 있는데, 대한예수교각교파연합 신도대회는 1950년 12월 27일 유엔 사무총장, 미국의 투르만 대통령, 그리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쟁은 자유, 민주국가와 공산독재국가 간의 최후 결전의 전초전이므로 유엔군이 승리할 때까지 전진 무퇴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내외에 천명하였다. 또 한경직 목사와 유형기 목사를 미국에 파견하여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한편 피난민 구호를 위한 여론을 형성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에서 주한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이 지대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취급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1951년 3월 38선 이남을 모두 탈환한 이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내외로부터 휴전에 대한 요구가 대두되어 1951년 7월 10일 전전 협상이 개시되었다. 이 때 부산에서 ‘구국신도대회’를 개최하고, 한국기독교회는 정전을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이루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피난지 부산의 기독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채택한 결의문은 아래와 같다.
“정전 반대 신도대회의 결의문, 우리는 조국의 완전 독립과 세계평화에 대한 신의 축복을 빌어 마지아니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세력 남침에 의하여 전토(全土)가 폐허화 되었고 수백만의 인명이 피살되었음은 비통한 사실이다. 앞으로 보다 더 가혹한 유혈을 강요하고 있는 차제에 개성에서 개최된 정전 회담에 대하여 전 세계는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 한국의 백만 신도들은 속한 기일 내에 정전되어 평화의 봄이 오기를 절원(切願)하는 바이다. 그러나 원수의 38선이 강토를 분할하고 철의 흑막이 동족 강압을 계속할 우려가 있는 한 여하한 협정도 찬성할 수 없음이 우리의 결의임을 명백히 하는 바이다. 38선을 중심한 정전협정은 거(去)6.25 사변 이상의 불법 침입을 계획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며, 따라서 UN의 오늘까지의 희생은 도로(徒勞)케 되며 태평양을 혈해(血海)로 화할 비극이 연출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여하한 고통과 희생이 있다하더라도 공산세력을 국경선 외로 몰아내고 한국 남북통일의 완전독립을 지향하여 일로매진(一路邁進) 할 것을 굳게 결의하는 바이다. 주후 1951년 7월 12일, 在釜山韓國信徒大會.”
기독교계는 정전 협정을 반대하고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 달라는 호소였다. 이런 휴전협정 반대 입장은 교계의 변함없는 입장이었다. 1953년 6월 15일에는 구국신도대회 이름으로 ‘세계교회에 보내는 휴전반대 성명서’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53년 6월 14일에는 서울에서 약 2천명의 기독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북진통일기원대회’(대회장 전필순 목사)를 개최했고, 1953년 6월 15일에는 NCC 주최로 ‘전국 기독교신도 구국대회’를 개최하고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