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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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33년째 담임 목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참 많이도 했습니다. 심방도 많이 했습니다. 온갖 회의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사역의 종착지점이 가까워지면서 지난날의 목회를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그동안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의 목표를 교회의 부흥에 두었는데, 이것이 심각한 실패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목회자를 부르신 목적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의 부흥에만 매달렸습니다. 더구나 부흥이란 것이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믿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맞겠지만, 한국교회에서의 부흥이란 단지 사람이 많아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많으면 부흥한 교회요, 부흥한 교회의 목사는 목회에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이런 목사에게 박수를 보냈고, 목사는 자신을 성공한 목회자로 자부했습니다.

이 과정에 많은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는 한없이 교만해졌고, 교회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했습니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한국교회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자랑했지만, 오히려 실망한 이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또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깊은 좌절에 빠졌고, 자신을 실패한 목사로 여기는 열등감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성공한 목사로 자부하던 사람도 상처를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은 그로 인한 혜택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막상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훌륭해 보이던 교인들이 갈라져 싸우는 모습을 보고 은퇴하면 주님 앞에 갈 때까지 후회하게 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되돌아보니 목회의 본질은 사람을 많이 모으는 부흥은 아닙니다. 목회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만 바르게 전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는 <너 수고 많았어>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본문 말씀은 매우 은혜가 됩니다. 시편 138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주석가들은 본 시가 다윗이 말년에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면서 지은 감사의 시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말 많은 은혜를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3절은 그 핵심입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숱한 위기와 죽음의 사선을 넘어야 했습니다. 어려울 때가 정말 많았습니다. 그때가 <간구하는 날>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거나 못할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다윗에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다윗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힘과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서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도우셨을까요? <내 영혼에 힘을 주어>라고 했습니다. 모든 힘 중에 영혼에 주어지는 힘이 최고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의 힘을 믿지만, 영혼에 힘이 충만한 사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힘이 최고입니다. 다윗은 비록 전쟁터를 누비고, 쫓기며 노숙을 해도 영혼에는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약해 보였지만, 강했습니다. 그 모진 고난에서도 그는 강하게 버텼습니다. 하나님이 강하시기에 그도 강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목회자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목회자도 본질에 충실하려면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께 간구하여 영혼에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전하는 본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도들도 영혼에 힘을 얻어 강해져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3절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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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내 영혼에 힘을 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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