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0(목)
 


홍석진 목사.jpg

근간에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말이 유행입니다. 이른바 ‘과학방역’ 논란으로 급격히 퍼지기 시작한 듯한데, “각자도생 방역 오해, 의미 전달 부족했다”는 질병관리청장의 공식적인 해명이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7. 26). 115년 만이라는 최악의 폭우로 한강 이남이 물바다로 변한 며칠간의 혼란상 속에도 “직장인들은 알아서 각자 도생하라는 말로 들려 씁쓸하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습니다(세계일보, 8. 10). 사실 이 말은 코로나 시대에 진입하면서 심심찮게 등장하곤 했는데, 이제는 정치판에서도 집권여당의 난맥상을 두고 “정부 힘든데 당까지 각자도생”이라 하고, 연예계에서도 “뿔뿔이 흩어진 걸그룹 출신들이 각자도생하며 연예 활동의 2막을 열고 있다”고 썼으며, 어느 목사는 “이제 크리스천은 각자 도생해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cafe.daum.net/s.shool). 벌써부터 ‘각자도생 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도 있었는데, 이년 전 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전영수, 2020. 3).

놀랍게도 각자도생은 순수한 우리말 사자성어라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실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殺戮之禍 使之各自圖生也(살륙지화 사지각자도생야)’ 곧 ‘살륙지화(에) 각자 자기 살기를 도모하게 하라’는 임진왜란 기간의 기록입니다(선조 27년 9월 6일, 1594년). 다음으로 ‘臨亂遺君 各自圖生 罪實非細(임란유군 각자도생 죄실비세)’ 곧 ‘난리를 맞아 임금을 버리고 각자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실로 작은 죄가 아니다’, 이는 병자호란 때의 기록입니다(인조 5년 10월 4일, 1627년). ‘今焉離井去里 各自圖生(금언이정거리 각자도생)’ 곧 ‘지금은 정리(마을)를 떠나 각자 살기를 도모합니다’는 흉년의 실상 속에 올린 상소문에 등장하는 문구입니다(순조 9년 12월 4일, 1809년). 이들만 보아도 각자도생이란 말을 어떤 경우에 사용했는지 금방 알겠습니다. 전란 속에서 기근 속에서 각종 고난 가운데 정부를 비롯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우리네 선조들은 각자도생이라는 인생판의 외통수에 내몰리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각자 살기를 도모해야 하는 사람들은 저들만이 아닙니다. 각자도생이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어렴풋하게라도 느끼고 있는 필연적인 좌우명일지도 모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고 가르쳤던 노리나 허츠(Noreena Herts)는 『고립의 시대(The Lonely Century)』(웅진, 2021)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 결과 오로지 승자만을 위한 이 사회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은 남에게 뒤처진 패자라고, 결국에는 우리 모두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이제는 전통적으로 일과 공동체를 단단히 묶어주던 밧줄이 썩어가고 있고 사회안전망이 잠식되어 사회적 중요성이 축소되고 있다.”(29) 코로나 광풍전야였던 2019년 연말을 맞아 직장인들이 선택한 올해의 문구가 벌써 각자도생이었습니다(인쿠르트 설문조사).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는 각자도생의 길로 빠질 것이다”, 일찍이 경제학자 로버트 머튼(MIT)이 했던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그래, 나밖에 없어, 나를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이런 생각을 한번쯤 해보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각자도생이 무조건적으로 해롭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 방역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근자에 질병관리청장이 남긴 말의 일부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요하다. 다만 정부의 조치로 갈 것이냐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갈 것이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발적”이란 말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각자도생이란 결국 자발성이나 자율성의 극성이라 볼 여지도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극성’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적인 돌봄과 온정으로 보완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적으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신자가 각자도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물론 신이 방관하고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각자도생해야 하는 건가, 이런 의문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의 이 말을 기억합시다. “신의 침묵은 인간의 침묵과는 다르다.. 신의 침묵은 사랑을 통해서 말씀으로 변한다. 신의 말씀은 스스로를 비치는 침묵, 인간에게 스스로를 바치는 침묵이다.”(침묵의 세계, 266-2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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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각자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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