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6(금)
 


박용성 목사.jpg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청소년은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큰 관심사며 화두라 할 수 있다. ‘다음 세대’라는 이름으로 보호하고 격려하고자 하지만 저출산과 각종 문제로 막상 그 대상이 없어진지 오래됐다. 특히 교회적으로는 부서 자체가 없어진 교회를 흔히 볼 수 있으며 사회 학교에서도 인원수가 줄어들고 학급이 줄어드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생계를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지나친 방임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있을 것이고 반대로 지나친 간섭으로 옥죄어서 나타나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런 문제들마다 상당수의 부모들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곤 한다. “저희도 부모가 처음”이라서. 맞는 말이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를 이유로 하기엔 더 많은 가정은 지극히 평범하게 화목하게 잘 지낸다. 그건 그들이 결코 부모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민하다가 ‘지나친’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말처럼 지나친 사랑이 오히려 독이 된 전형적인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해결점은 결국 ‘믿음’에 있다는 다소 진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비행 청소년의 보호처분 기간을 늘리기 위해 재판에 참여(위탁보호위원 자격)하게 됐었다. 재판을 위해 청소년과 그의 보호자도 함께 출석했으며 이내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런 와중에 보호자는 처분 결과에 대해 납득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다며 소란을 피우며 막무가내인 행태를 보였다. 결과는 바뀌지 않은 채 재판은 끝이 났고 분이 풀리지 않은 보호자는 학생의 담당 선생님께 온갖 욕설과 협박의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었다.

 

어떤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보호자된 사람으로서 내리사랑의 아름다움처럼 보이는가? 동시에 이와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하나님께 바쳤던 사건이 떠올랐다. 하나는 다른 사람은 믿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이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아집과 교만의 결과였고, 하나는 자기의 낮음을 인정하며 전적인 신뢰를 보인 결과였다.

 

만약, 저 보호자가 법원과 센터 선생님을 전적으로 믿었다면 과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너무 사랑하는 내 자식이지만 너무 안타깝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더욱 신뢰하며 기꺼이 맡기지 않았을까? 이러한 얘기는 사회적으로만 통용되는 것일까? 이러한 맥락을 따라 교회에서 우리 자녀들이 진짜 믿는 믿음이란, 부모들이 진짜 믿는 믿음이란 무엇일까? 왜 중고등부 사역이 어렵고 왜 중고등부 아이들 전도가 어렵고 주일이면 시험기간이면 학원 가기 바쁘고 심지어 그렇게 떠나기까지 하는 것일까.

 

교회 선생님들이 사역자들이 못나서 그런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저 사례와 유사하게 가정에서 믿음의 대상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확신한다. 아무리 교회 선생님들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쳐도 고작 일주일에 한 번 가르치는 것과 일주일 내내 생의 곁에서 내 혈육인 부모가 학원과 세상을 더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몸소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인다면 과연 어느 것에 힘이 더 실릴까. 그것은 엄청난 은혜와 노력이 아니고서는 후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평일 6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세계관으로 똑같이 살다가 고작 주일 하루 교회에서 설교와 프로그램으로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건 결국 교만이고 허황된 욕심 아닐까. 그러다 변하지 않으면 교회를 탓하며 저 보호자와 같이 행동하지는 않을까.

 

또한 반문할 수 있겠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도 가르친 적도 없냐고. 그러나 또한 명심해야 한다. 가정에서의 교육이란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일부일 뿐, 부모가 사는 모습 그 자체가 곧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금쪽같은 내 새끼는 부모가 제일 잘 알고 부모만이 답이리라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맡길 수 있어야 한다. 학원을 그래서 보내는 것 아닌가. 부모보다 더 잘 가르치리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더욱이 하나님이 유일한 위로자요 부모요 스승이라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의 것보다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에서는 찾을 수도 구할 수도 없는 가치를 교회를 통해서는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도록 자녀에게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먼저 부모가 그렇게 살아내는 모습으로 자녀에게 가르쳐 양육해야 할 것이다.

 

온전한 사랑으로 완전한 믿음이 자녀에게 잘 전해지기를, 그를 통해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더불어 아름다워지고 부흥하는 날을 속히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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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금쪽같은 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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