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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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보다 더욱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웃이 더 이상 이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에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시끄럽다고 신고를 하고 서로 싸웁니다. 주차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집 앞에 옆 집사람이 주차하면 반드시 욕을 하며 싸우게 됩니다. 더 이상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눅10:29 말씀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율법교사는 눅10:27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해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개념상 이웃에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교사는 아마도 그의 친족과 같은 동료 유대인들에게는 선을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좁은 의미로는 같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마을에서든 성읍에서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사는 낯선 자도 모두 ‘이웃’이어서, ‘이웃’은 ‘같은 사람’을 뜻했습니다. 레위기 19장 34절 말씀에는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에서 이 거류민은 타국인, 객을 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에서 신앙을 바르게 보존하고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를 두고 격렬히 다투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시기 전 200년 동안에는 ‘이웃’ 개념이 아주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실제로 ‘신앙의 동지’ 또는 ‘같은 당원’이라는 정도의 뜻만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율법에서 본래 뜻하고 요구했던 ‘같은 사람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 불리는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을 들려주시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웃의 개념에 자신의 친족이나 가까운 동지 유대인들만을 포함시킨 율법교사의 위선과 편협한 사고를 이 비유를 통해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유대사람이 한적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그 강도가 그냥 깔끔하게 돈만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그 강도는 아마도 그 유대인을 죽일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죽을 정도로 폭행을 당한 유대인은 길가에 그냥 버려졌습니다. 그 유대인에게 당연히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모른 척 지나칩니다. 그런데, 천대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내용입니다.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친절을 베푸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당연히 누가 이웃인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럼, 누가 이 강도당한 유대인의 이웃입니까? 누구나 아시겠지만 사마리아인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나는 율법을 잘 지킵니다.’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답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 같은 동네의 사람, 아는 사람, 등등이 그 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답이라면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들려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물리적인 거리나 친분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증오와 미움의 벽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이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사랑을 베푸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을 회복했고, 신앙을 지키며 산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이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알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편의에 맞게 이웃의 범위를 각자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만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부자의 이웃은 부자만 되고, 가난한 자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젊은 사람의 이웃은 젊은 사람만 되고, 나이든 사람의 이웃은 나이든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람의 이웃은 한국 사람만 되고, 외국인의 이웃은 외국인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만드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이웃이 아니었던 사람을 이웃이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부자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이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하면 서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할 대상을 알게 모르게 기독교인이라고 경계를 그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의 경계를 그어놓고 그 안에서 엄청난 헌신과 사랑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경계를 그어놓고 사랑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경계를 넘어가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필자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의 이웃이 누구인지 생각했습니다. 제가 만나는 위기 청소년들, 그의 가족들, 저의 도움이 필요한 모두가 저의 이웃입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니까 복음 안에서 회복이 일어납니다. 이번 주에 어떤 부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아이는 선생님 만나서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과 몸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 비유 속에서 이웃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실천하는 2023년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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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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