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과이불개(過而不改), 혼용무도(昏庸無道)한 세상에 사람들과 교회(목회자들)에 하고픈 말
『착하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와 『교회에게 하고픈 말』을 읽고
1. 착하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2023년 새해, <교수신문>은 지난 한 해를 대표할 ‘올해의 사자성어’로 “잘못을 범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라는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선정했다. 신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지금까지 이태원 참사와 같은 후진국형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지려는 정치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또한 작년 2022년 한해를 돌아보니, 우리는 혼용무도(昏庸無道), 곧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한 세상을 살아왔다. 이 말은 ‘혼용(昏庸)’과 ‘무도(無道)’의 합성어이다. 혼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을 함께 일컫는 말이며, 무도는 『논어』(論語), ‘천하무도(天下無道)’, 곧 “세상이 어지러워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다.”에서 나온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2022년 한해 ‘과이불개’와 ‘혼용무도’한 세상을 살아왔다. 따라서 2023년은 이러한 잘못이 열매를 맺어 경제위기는 물론, 정치와 외교 등 모든 부문에 있어서 엄청난 고난과 고통이 닥칠 것이다. 최근 각종 물가가 치솟고 있다. 전기 요금부터 버스, 지하철 요금까지 공공요금이 줄줄이 인상하고 있다. 서민들은 죽어 나가지만 재벌 법인세는 깎아주고 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혼용무도와 과이불개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왜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은 집단 내에서 힘을 합쳐 다른 집단을 공격하여 이긴 부족이 살아남았기에, 이러한 싸움의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해 왔다. 초등학교 가을운동회 청백전 때 왜 그리 투쟁심이 솟았는지, 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지난 대통령 선거에는 왜 그리 관심이 많았는지, 모두 진화심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극우 유튜버가 계속해서 살아남는 방법, 현재 정치가 양극단으로 치닫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진화의 산물이다.
결국 현실은 ‘공감’과 ‘소통’이 아니라, ‘공격’과 ‘혐오’를 부추기는 것으로 진화한 것인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고 협력할 때 즐거움을 느끼도록 진화됐다. 싸움을 통해 최강 제국을 세워 온 인류의 역사는 항상 그 끝이 좋지 않았다. 결국 협력과 공감이 마지막에는 승리한다. 처음에는 싸움의 과정에서 느끼는 승리하는 쾌감이 좋지만 결국은 협력할 때의 쾌감과 결과가 더 좋았다는 것을 우리 인류는 체득한 것이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아도 인간이란 수십억 개의 세포가 연합된 다세포 생명체이기에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협력이다.
오산 임마누엘장로교회 주용태 목사의 책, 『착하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따뜻한 힘의 원리』(트러스트북스, 2023)는 ‘착함’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이루는 굵은 흐름을 주목하고 우리에게 착하게 사는 것이 맞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던져 준다. 주용태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착한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마십시오. 착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호구, 이 사회의 천덕꾸러기입니다.’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영상의 내용에 내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저런 말을 버젓이 할 수 있지? 댓글들을 살펴보니 더욱 놀라웠다. 수많은 사람이 맞장구치며 동의했다. ‘정말 그래요! 저도 많이 당했어요, 결혼 완전히 잘못했어요. 제 남편은 사람은 착한데 답답하고 무능해요.’ 정말 이 말들이 사실일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세대의 영웅들을 생각해보라. 김연아, 유재석, 손흥민, 김연경, 박항서 감독… 착한 사람들이 성공 반열에 오른다. 그들에게서 조금의 악의라도 엿보였다면 그처럼 큰 대중의 호응이나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착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자기 분야에서 퇴출당한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영화감독, 유명작가, 운동선수, 정치인, 유명 배우 등이 한순간 저지른 잘못 때문에 낙인찍혀 사회에서 퇴출당하였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는 이 엄청난 변화를 실감하고 그에 맞춰 살아야 한다. 물론 착한 사람이 모두 잘되고 성공하지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착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다. 성공은커녕 착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못된 사람이 잘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당장 보기에’ 그렇기 때문이다. 결국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기간’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착한 사람이 불리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착한 사람이 성공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중을 보지 않고 당장 좋으면 다 좋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늘 손해 보고 악한 사람은 늘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공격’과 ‘혐오’를 부추기는 이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공감’하고 ‘소통’하고 ‘배려’하고 ‘연대’하는 이들이 이긴다. 이것은 진화심리학의 관점만이 아니라, 역사의 교훈이며 성서의 진리이기도 하다.
착하지만 바로 그 착한 것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 착해서 손해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착한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들, 착한 것을 약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착하기 때문에 인생을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진정 놀라운 세상의 맛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어쩌면 ‘착함의 결정체’가 아닌가? 따라서 결론은 우리 모두 “착하게 삽시다!”
2. 교회에게 하고픈 말
『교회에게 하고픈 말』(두란노, 2020)이라는 책이 있다. 전 백석대 신대원 교수인 류호준 교수의 책이다. 이 책에서 류호준 교수는 오늘날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에 관해 이렇게 지적한다. “목회자는 성경을 무시하고, 교인들은 성경에 무지하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한국교회에 온갖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 보수적인 교회들은 성경 자체(문자 자체)를 우상화하여 ‘성경 문자 우상주의자’가 되었고, 진보적인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중시한다. 또한 신학교와 교수들은(아닌 분들도 많지만) 단지, ‘(서양)신학 지식 소매상’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무지와 무시 속에서 성경의 본질은 희석되었다.
말씀을 무시하기에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어버린 목회자와 말씀에 무지하기에 맘몬을 추구하는 중직자들이 이끄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말씀에는 무지하지만, 싸움에는 유능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에는 무관심하지만 자기 이익에는 밝다. 이러한 교회의 신앙 적폐 목록을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나열한다. “자기중심적 신앙, 종교적 열정 강조, 구원의 사회성에 대한 무지와 외면, 무차별적 고소·고발,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도덕성, 기업화된 교회, 시대착오적 성경해석 등등….”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개혁의 후예라면 성경을 무엇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말씀을 무겁게 여기며 매일 그리스도와 죽고 사는 일에 천착한다면, 한국교회에 실천적 무신론자나 ‘카더라 신앙생활’ 성도가 없어질 것이다.”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이다. 그 근본은 성경이다.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씀처럼 닮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한국교회 구성원 모두가 말씀대로 빚어진다면 우리 사회에서 극단주의나 근본주의 구호를 외치는 그리스도인, 무례한 기독교인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목사에 관해서도 류호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목사는 죽음과 삶, 이생과 사후, 시간과 영원, 비참과 구원, 심판과 회복 사이에 서서 그 다리를 이어 주고 건네주는 사람입니다. 달리 말해, 이쪽에 있으면서 저쪽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본향을 사모하도록 자극하고, 삶의 충만한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도록 도와주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목사이며 설교자입니다.”
목회자에 관한 류호준 교수의 말을 한 구절 더 인용해 보자. “목회자가 교인들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거나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귀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는 종교적 사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영적 부담감, 다시 말해 하나님의 값진 구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없는 사역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목회자가, 제사장의 나라로 부름을 받은 교회가, 또한 천국의 열쇠를 받은 교인들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 사회 전체가 불행해질 것이다. 따라서 류호준 교수는 교회가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부단히 세상의 경계를 넘어 약자를 찾아가고 이들을 섬겼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도 약한 이를 보살피는 환대의 정신을 갖추자.”
그렇다. 이것이 택하신 족속의 사명이고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이며 거룩한 나라의 마땅히 행할 바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할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인용해 보자. 류호준 교수의 고백에서 기독교 신앙의 참뜻을 깨닫게 된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분위기 안에 ‘은혜로 가득한 환대’를 불어넣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환대를 통해서 기쁨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마치 철철 넘쳐흐르는 물 대접처럼 말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흘러내리는 눈물 속의 포옹, 숨 막히는 기쁨,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둘러메고 외치는 기쁨의 소리,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손들…. 우리가 은혜로 가득한 환대를 베풀 때, 우리는 환대받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고,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나고 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우리 교회가 환대의 공동체가 되고, 또한 우리를 통하여 환대받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여야 한다. 과이불개(過而不改)와 혼용무도(昏庸無道)한 세상에 사람들과 교회,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