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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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러분의 자녀나 다음세대가 “왜 예수님만 믿어야 해요? 세상에는 여러 종교들이 있고 여러 신앙들이 있는데 왜 예수님만 우리를 구원하시죠?”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원주의의 도전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원주의란 예수님만 구세주가 아니라 어느 종교나 어느 대상이나 하나님이 될 수 있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다원주의는 신은 마치 산 정상에 있는 것과 같은데 인간이 어떤 길로든 올라가기만 하면 결국에는 다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길은 다르지만 결국은 신에게 다다를 수 있으니 모든 종교는 다 똑같다.’라고 하는 게 다원주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다원주의 논리에서는 누구를 믿느냐 하는 신앙의 대상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중요하지 않고 도리어 믿는 인간의 열심히 중요해집니다. 얼마나 열심히 믿냐, 얼마나 열심히 산에 올라가느냐, 얼마나 열심히 정성을 드리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분들을 여러분들 아시잖습니까?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그 새벽에,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서 그 물을 뜨고 그 깨끗한 물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하는데 그 기도를 누가 듣는지를 모릅니다. 그걸 누구한테 비는 겁니까? 달님한테 비는 겁니까? 별님입니까? 구름입니까? 하늘이 듣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 기도를 열심히 드립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직장 다니는 분들 보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개업하면서 돼지머리 놓고 그 코에 돈을 꽂아 넣으면서 고사를 지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 정성을 누가 받는 건지 아냐고 물어보셨습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그 정성은 갸륵하지만, 그 정성이 누구에게 가는 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위안을 받는 겁니다. “난 열심히는 했어. 나는 그냥 최선을 다했어. 정성껏 했어. 그러니까 내가 정성을 드렸으니까 좋은 결과가 날 거야.” 그게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다원주의는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기독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모든 다원주의를 부숴버립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 모든 다원주의, 모든 실용주의를 부숴버리는 게 기독교입니다. 다원주의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만약에 산 위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이 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올라가면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정상의 자리를 박차고 우리에게 내려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높은 곳에 가만히 앉아서 “야! 올라와 봐! 실력껏 올라와! 올라오는 사람만 내가 만날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갈 능력이 없는 우리, 하나님을 만날 능력이 없는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는 모든 종교를 뒤집어엎습니다. 모든 종교가 다 “열심히 믿어라! 잘 믿어라! 최선을 다해라! 너희가 잘하면 하나님이 너를 만나 줄 수도 있다. 천국 갈지도 몰라!”그게 신앙이었다면 이제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 주시고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끌어안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시는 새로운 체계를 구축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심과 정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를 사랑하시고 누구를 부르러 찾아가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가 중요해집니다. 그분은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돈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 이름난 사람만 품어 안는 사랑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찾아와서 만나 주십니까? 주님은 누구를 선택하셨습니까? 여기에 대한 기준을 마가복음 2장 17절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2:17)

 

이 말씀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의사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병든 자에게라야.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내가 병이 들어 죽게 생겼는데 이게 난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 겁니다. 난 어떻게 이 병을 치유할 수도 없고 이 병을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의사에게 목을 메고 매일매일 찾아와서 나 좀 고쳐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 그 미천한 사람, 그 막막한 사람, 그 병든 자, 그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쓸 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영혼의 치료자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오, 다음세대가 믿고 따를 진리가 되십니다. 우리, 다원주의의 도전을 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부모와 교사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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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다원주의를 넘어 예수님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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