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샘 올트먼(Sam 미스무)과 공동으로 설립한 <오픈 AI>에서 공개한 신제품(?) 하나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어로 정식 명칭은 “CHAT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줄여서 ‘챗GPT’)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잡담하는 로봇’(챗봇, chat-bot) 혹은 ‘생성 AI’ 즉 생성 능력이 있는 인공지능이라 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 말입니다. 작년 12월 1일 공개된 이후 고작 두 달 만에 사용자가 천만 명을 돌파하면서 구글(Google)의 자리마저 위협하지 않을까 할 정도의 파죽지세(破竹之勢)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챗봇”은 질문이나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자료나 지식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기존의 검색엔진과 달리, 이름의 뜻 그대로 ‘생성적 사전 학습 수행’ 능력을 발휘하여 관련된 정보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은 물론이요 답안지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준마저 능가합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의 맥 혁신경영연구소는 최근 ‘챗GPT가 와튼 MBA를 수료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챗GPT가 필수 교과목인 ‘운영관리’ 기말시험에 응시하여 ‘B-’에서 ‘B’ 학점 사이를 받았다고 알려왔습니다. 상당히 준수한 성적입니다. 경영 실력이 이 정도라면 로스쿨은 어떨까요? 비슷한 시기의 N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챗GPT는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치러 진 로스쿨시험마저 거뜬히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렵기로 소문난 의사 시험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최근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의료 스타트업인 앤서블헬스 연구진은 챗GPT가 미국의사면허시험(USMLE)에 응시한 결과 모든 시험에서 50% 이상의 정확도를 보이며 합격가능한 점수를 받았다고 발표했습니다(이상 매일경제 2023월 1월 26일 기사에서 발췌). 물론 아직까지는 언어의 문제점이라든지 여러 가지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한 모델은 ‘GPT-3.5’ 버전으로서, 향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GPT-4.0’가 출시된다고 합니다. 286에서 시작했던 컴퓨터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 컴퓨터와 비교할 수도 없는 인공지능이니, 앞으로 어떻게 얼마만큼 진화할지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장은수는 한 칼럼(챗GPT와 창의성)에서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프레히트의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열린책들 펴냄)의 한 대목을 소개하는데, 인공지능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잘할 수 있나요?”라고 묻자 “대화 잘하고, 공감 잘하고, 자주 고마움을 표하고, 어려울 때 흔쾌히 도우라”는 식의 다소 지루하게 들리는 답을 내놓았다고 하면서, “틀리지는 않지만 흥미롭지도 않다. 사랑을 잘하려면 무수히 변하는 상황에서 연인의 감정과 기분, 생각과 뜻을 살펴 그때그때 눈치껏 잘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고 피곤하며, 진정한 모든 관계는 사적이다.”라고 썼습니다. 로고스(logos)는 몰라도 인간적인 파토스(pathos)는 어림도 없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종교적인 분야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역시 편집자 발 기사에서 “챗봇은 연구도 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며, 웅변까지도 할 수 있겠지만, 설교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러셀 무어, 1월 26일). 마음은 물론 영성은 절대로 갖출 수 없을 거라는 확신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떨까요? 지난 신년 첫 날 뉴욕주 햄튼 유대교회당에서 조시 프랭클린이라는 랍비가 메시지를 전한 후 감동을 받았다는 청중들에게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챗봇이 작성한 설교문을 읽었노라고 밝혀서 충격을 선사한 바 있습니다. 최근 챗봇이 썼다는 “선임장로님의 장례식 설교문”은 어떻습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이 교회와 지역사회에 많은 것을 바친 사랑하는 선임장로님의 삶과 유산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큰 손실이지만 그가 우리 모두에게 미친 영향을 기억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그를 기리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교회 건축에 헌신했고, 사람들이 예배와 공동체에서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했습니다. 그의 친절과 관대함, 교회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최승현). 솔직히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소수자보호와 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던지자 “혐오와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무분별한 조롱과 악의적인 댓글 그리고 ‘카더라’ 통신과 ‘아니면 말고’ 식의 논설이 난무하는 인간의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는 챗봇이 쳐다보지도 못할 그런 지경에 있다고 우리는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