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광야에 서 본 적이 있는가?
광야에 가면 끝도 없이 펼쳐진 길,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에 잡힐 만한 것이 없다. 광야에서는 먹을거리도, 잠을 잘 곳도 찾지 못하고 생존이 막막할 때는 그저 하늘을 보며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예전에 내가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광야에서는 그저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된다.
인생의 광야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인생의 광야에 서면 끝도 없이 펼쳐진 삶의 막막함,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없다. 관계도 막히고 물질도 막히고 심지어 내일의 희망조차 막혀버린 인생의 광야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하늘을 보며 지금 당장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는 일 밖에 없다.
실제 광야든, 인생의 광야든 광야라는 막막함 속에 들어서면 구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다.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만 생각하다보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았는지, 구하고 살았는지, 원하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하나님까지 이용한다는 사실도 광야에 들어서면 알게 된다.
그렇기에 광야에 서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은혜가 임한다. 지난 주 금요 기도회에서 부르짖었던 기도가 사실은 나의 필요가 아닌 나의 원함에서 오는 사치라는 것, 내가 눈물을 흘리며 구했던 것이 나의 편함과 나의 안위라는 사실이 광야에서는 보이게 된다.
이쯤 되면, 광야에 서있지 않더라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나는 어떤 생각에 물들며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내가 발판으로 삼는 가치관들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지극히 인본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로 살아가는 나에게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첫째, 광야가 필요하다. 광야에 들어선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세상에 속한 일상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발적으로 광야에 발을 들이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무엇보다 광야로 들어갈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광야가 더 필요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할 수 없는 멈춤, 쉼, 깊은 생각, 변화를 위해서는 광야가 필요하다.
둘째,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전에는 정답이라 생각한 것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오답일 수 있고, 그토록 열심히 한 일이 한 순간에 헛수고라 여겨질 때가 있다. 우리가 종종 범하는 어리석음 중 하나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라고 단정짓는 행동이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여기며 다시 생각하는 태도, 굳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자세이다.
셋째, 새로운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변화는 필요, 결핍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필요, 우리에게 없는 결핍이 무엇인지 발견이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살아있는 생명이나 사회는 새 변화를 원한다. 특히 지금처럼 복잡한 사회는 단순함, 순결함을 원하기에 이 필요에 맞춰 새로운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넷째, 하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가 여기에 함몰되면 마치 천국은 없는 듯, 이 세상이 영원한 듯 분별하지 못하고 살 수 있다. 이럴 때, 여기가 광야라고 생각하고 하늘을 쳐다보아야 한다.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삶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제 다시 우리는 세상 속에 광야에 서있다.
내버려두면 끊임없이 하고 싶은 대로 달려가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 광야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추구하는 것은 필요한 것인가? 원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솔직히 답하는 것을 시작으로 3월, 봄을 향해 한걸음 나아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