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8(금)
 


홍융희 목사.jpg

프랑스의 화가 제임스 띠소가 1894년에 그린 “우리의 구원자는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 사람들을 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십자가를 둘러싼 여러 군상들이 참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네 가지 시선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십자가형을 집행하고 있는 로마 병정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당당하게 서서 예수님의 죽음에 이들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 군주의 명령대로 아무 생각 없이 정해진 군법대로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 뿐이죠. 이들은 타인에 대한 감정 자체가 없습니다. 다만 일일뿐이니까요. 이들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지만 그 열심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 가는지, 아파하는지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과 율법사들 같은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을 타고 보란 듯이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 있습니다. 마치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겸손하신 왕 예수님을 업신여기듯이 말입니다. 입만 열면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이 땅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성공에만 집착하는 자들이죠.

 

세 번째로는 십자가 사건을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지나가는 구경꾼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성한 소문의 주인공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서 크게 힘을 써서 저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또 얘기는 달라지겠죠. 그러나 패배자 예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앙에 절망에 휩싸인 십자가 밑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여인들입니다. 아마 이들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또 한 사람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자 예수님에게는 이모가 되는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자, 이곳에는 이렇듯 네 가지의 시선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이 중에 세 가지는 교회 밖 사람들의 시선이고 한 가지만 교회를 다니는 우리의 시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 안에 이 네 가지 시선은 모두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로마 병정들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이 말하는 가치와 법칙에만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또는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던 유대 종교지도들처럼 자신의 지위와 신앙연수를 자랑하며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아니면 지나가는 구경꾼들처럼 교회 출석은 그런대로 하고 성경공부 제자훈련과 각종 교회 프로그램엔 열심이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주변인의 심정으로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온전히 절망하는 여인들 옆에 서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사랑하며 믿었던 주님이 죽었을 때 여인들이 절망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끝없는 비참한 절망 다음에 부활의 소식이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칠흑 같은 죽음과 절망 속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신다는 것, 절망의 아픔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고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여인들의 이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네 명 모두 이름이 ‘마리아’라는 점은 매우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여자를 대표하는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쓰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쓴 맛을 단단히 본 여인의 이름이죠.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백성들에게도 고난과 절망의 순간은 찾아옵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고통과 아픔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아프게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밑에서 비통에 잠긴, 십자가 밑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흐느끼던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절망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지막 목적지는 절망과 패망의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의 나락 한 가운데 숨겨진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절망하던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보면 마리아라는 이름에는 ‘쓰다’라는 의미 외에도 또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반란’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존의 슬픔과 실패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는 반란의 여인이 바로 마리아인 것입니다. 사람의 가능성과 기대가 끊어진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부활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다음세대 사역도 코로나19 이후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벌써부터 여름행사를 축소해서 진행한다는 교회들, 교회학교가 사라져서 여름행사가 없어졌다는 교회들이 속출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고통가운데 부활의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의 반란을 일으킵시다. 이 부활절에 우리 주님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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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부활을 바라보는 네 개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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