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용어로 ‘하이퍼골릭(hypergolic)’이라는 용어가 있다. hyper는 치솟는다는 의미이고, golic은 연료를 의미하는 독일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가령 두 가지 화학 물질이 있는데 이들이 각각 따로 있을 때는 아무런 화학 반응이 없다. 그러나 두 가지가 접촉하게 되면 발화하거나 폭발한다. 우주선도 그 기본 발상은 ‘하이퍼골릭’ 현상에 의한 연소 작용에서 생기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에서 착안되었다.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로 치솟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초현실주의를 hyper-realistic이라 한다. 몹시 흥분한 상황을 throw a hyper라고 하고, 자녀교육에 있어서 과잉양육을 hyper-parenting이라 한다. 진정 차원 높은 신앙의 하이퍼골릭이란 무엇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과의 불편한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 미래지향적 정치 행보를 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국민정서도 찬반론으로 뜨겁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운명적인 이웃, 싫다고 멀리 할 수도 좋다고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나라다. 야권에서는 굴욕적이라고 피켓 시위까지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일본과의 사이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지내야 할 것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적인 상황은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토의 넓이와 인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 일본을 앞서고 있다. 굴욕외교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Spencer)는 그의 저서인 「개인 대 국가(The Man Versus The State)」에서 ‘Only the strong survive’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동학 난(東學亂)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죽창으로 총을 이길 수 없었기에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죽창(竹槍)이 아니라 반도체를 비롯한 한류문화(韓流文化)로, 역사적 원한이 아니라 미래적 역사관으로 일본에 맞서야 할 때다. 그리고 이겨야 할 당위성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얼어붙은 한일관계 12년의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국제질서의 리더 국가를 향한 걸음을 행보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군사적 강국으로 G8 가입의 문턱에 서 있다. 특히 장자가 갈파한 목계지덕(木鷄之德)으로 일본을 대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하이퍼골릭을 생각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강단의 설교에서는 재림에 대한 메시지가 들리지 않는다. 예배 찬양에도 재림을 고대하는 찬양은 부르지 않는다. 종말론 신앙이 내재되어야 오늘의 삶에서 올바른 신앙의 가치개념이 활력을 얻고 미래를 향한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데 곳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원망과 불평, 비판과 정죄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산 위의 동네로, 등경 위의 등불로서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국내외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신앙과 삶의 괴리,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의 불일치에서 오는 갈등 등인데 참으로 부끄러운 말이지만 극단적 이기주의 현상이 빚어낸 결과이다. 교회가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사회는 어둠의 역사로 전락되는 것을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얼마든지 경험했다.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어둠의 현상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앉아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으로 오늘을 엮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인류 역사에 생명의 빛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생명의 ‘하이퍼골릭’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래서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빛의 삶이란 무엇인가? 빛이란 앞을 볼 수 있고 그래서 분간도, 분별도, 구분도 가능하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 그래서 정의와 사랑이 숨 쉬며 용서와 기쁨과 평화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빛이라 한다. 이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세 가지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 개인의 인생이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되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어둠을 광명한 빛으로 전환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를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시킨 생명의 은총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은총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고백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5:8-9).”
그렇다. 우리는 전에는 어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빛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제 부활신앙으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은 용서와 치유를 넘어 채찍을 드신다는 것을 깨달아 겸손히 엎드림으로 개인도 교회도 국가도 부활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트리나 폴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가 있다. 내용은 두 마리의 애벌레가 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것인데 줄무늬 애벌레와 노란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처음 애벌레였던 그들이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지난 후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되었다는 것으로 그것은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나비라는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부활의 의미를 새겨주는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바로 이런 영적 불기둥이 솟는다. 마음이 뜨거워지며 희망과 용기가 생겨난다. 이것을 나는 ‘신앙의 하이퍼골릭’이라고 하고 싶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 아무 힘도 없지만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되면 발화한다. 희망의 불꽃이 일고 용기가 발화한다. 기쁨이 샘솟고 사랑으로 충일한다. 그리고 내 삶의 장에서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난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경험함으로 신앙의 하이퍼골릭 현상이 나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와 정치와 사회문화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