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대주재 하나님
사도행전 4:23~31절
누구나 요즘의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각 교단에서 발표하는 교인이 줄고, 신학교 입학생이 줄고, 분규를 겪는 교회가 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사회적 영향력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정부를 비롯한 여러 사회 단위들이 기독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나 사학법 개정과 관련한 우리의 호소를 무시합니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교인은 적었지만, 민족의 견인차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교회가 감당하던 교육, 봉사 등의 모든 영역을 정부와 기타 사회단체에 넘겨준 채,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의 자부심도 위축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하고 얼버무립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졌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시시한 신이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의 믿음의 선배들이 가진 신앙을 보여줍니다.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은 정말 놀라운 열매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전체 주민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지만, 성령이 임하신 후에 그들은 권능을 받았습니다. 권능이란 뒤나미스, 즉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겉으로는 계란처럼 약해 보여도, 속에는 폭탄을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와 말씀 선포 앞에서 예루살렘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 와중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장애인을 일으키는 엄청난 이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일어서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들은 놀라서 모인 사람들에게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했습니다. 자신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이 사도들을 가두었고, 이튿날 이들은 공회 앞에 끌려갔습니다.그러나 공회원들도 이들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워낙 담대하게 외쳤을 뿐만 아니라, 걷게 된 사람이 사도들 옆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회원들은 할 수 없이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여 풀어주었습니다.
풀려난 사도들은 동료들에게 갔고, 이들은 합심하여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첫 부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시여>라고 시작하지 않고, <대주재여>라고 시작했습니다. 여기 <대주재>로 번역된 단어는 <데스포테스>로서 주인, 소유자, 통치자를 의미하며, 그보다 더 큰 이를 상상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절대 존재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은 대주재를 창조주로 고백했습니다. 24절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우리는 하늘과 땅과 바다를 알지 못합니다. 그 가운데 존재하는 만물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 입의 침 한 모금에 무려 5억 이상의 미생물이 있고, 우리 몸에는 3킬로 이상의 미생물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미생물들을 평생 몸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김응빈 교수님은 이들을 <반려 미생물>이라고 우습게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주 미세한 것부터 광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지으신 가장 위대한 분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대주재여>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한 배경은 아무리 예루살렘에 빌라도 총독과 헤롯 왕과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연합하여 주님을 대적하더라도, 하나님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실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시한 신을 믿는 게 아니라,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당당해야 합니다. 현재의 한국교회 상황이 어렵더라도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뒤에는 대주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당당합시다. 우리는 대주재 하나님의 자녀입니다.